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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16 조회수1,135 추천수2 반대(0) 신고

 

운명 하면 일단 어떤 느낌이 떠오르시는지요? 사실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많이 생각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흔히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때 그런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약 거부를 하려고 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상황도 전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땐 운명이라는 말보다 숙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적절한 것입니다. 

 

운명과 숙명은 조금 성질을 달리합니다. 숙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일 때 말하는 것이지만 운명은 사실 숙명과도 같은 운명도 자신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그걸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건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마치 운전자가 차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운전자의 마음이 어떻게 핸들을 조정하는가에 달려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일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를 만약 알고 있다면 그 인생은 좋은 인생이 될까요? 아니면 힘든 삶이 될까요? 사실 우리가 앞으로 되어질 일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그처럼 인생이 재미없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치 앞의 일을 모를 수 있기 때문에 미완의 인생을 그나마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게 되면 예수님 당신은 당신의 앞날에 일어날 일에 대해 잘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또 그걸 회피하려고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종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죽음 그자체로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예수님께서도 모르긴 몰라도 당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고통스런 수난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 처절한 십자가 죽음을 용인하셨을까요? 그다음에 죽음 그자체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당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럴 확률이 높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본다면 조금은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다시 원래의 몸대로 되살아날 것 같으면 애시당초 처음부터 왜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학을 따르면 무의미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어떻게 됐을 때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있을까요? 부활 이전의 몸과 확연히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을 했을 때 그때 진정 부활의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부활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잘 묵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음과 같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잘 죽어야 다시 인도환생을 해도 좋은 가정에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 말의 진정한 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 신앙인의 자세에서 보면 너무나도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가 부활했을 때 진정한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그때 부활할 때의 몸의 유전자를 지금 이 세상에 살 때 잘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유전자 속성에 따라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을 했어도 부활이라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무리 환경이 좋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 좋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한들 그 환경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그런 환경보다는 예전의 다른 환경을 더 선호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복음 안에서 그 해답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상에서 십자가와 운명을 같이 하며 죽을 때에만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속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전세계 금융계에서 스티브잡스로 불릴 만큼 투자의 귀재라고 하는 레이 달리오는 고통에 무엇인가가 더해져야만이 그 고통이 한 사람을 발전으로 이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가 '자기성찰'입니다. 레이 달리오라는 유명한 사람도 그냥 평범한 세상에서도 이런 진리를 발견한 인물입니다. 유명한 현대의 투자자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자기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말처럼 부인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고 부인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나의 답을 찾는다면 섬김을 받는 인생보다는 섬기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고 자기의 목숨을 다른 위대한 명분아래 초개처럼 던져서 희생하는 삶을 살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죽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죽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당신의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고 가신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영광의 부활로 이어지게 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자아를 못박고 그 자아가 진정으로 죽었을 때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고 하느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하루도 힘겨운 십자가가 다가온다면 그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아야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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