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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실한 믿음과 맹신의 차이는 무엇이 결정하는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17 조회수1,237 추천수2 반대(0) 신고

 

세상에는 세상 사람들이 신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의 종교로써 인정을 하는 종교가 있는가 반면에 겉은 종교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실된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이비 종교도 많이 있습니다. 원래 사이비 종교는 조선말기부터 근현대사에서 보더라도 사회 구석 곳곳에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원래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이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내면 면면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각각의 인물도 많이 포진돼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훌륭한 학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이비 종교에 현혹이 돼 빠지게 될까요? 아마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모든 이유를 포괄해서 하나로 정리하면 '생각하지 않는 신앙' '꼼꼼히 따져보는 면밀성 부족' 이게 가장 큰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아이러니한 게 오히려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이런 면에서는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서는 그렇게 학식이 뛰어나면 당연히 지적인 힘으로도 얼마든지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우를 범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 단체는 그런 사람들의 이런 치명적인 단점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처음엔 쉽게 그런 곳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실 하나에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휘말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가 되고 점차 그들 종교의 교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사실을 합리적인 사고로 의문을 가지고 정말 그런가 하고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에서 사이비에 빠질 뿐만 아니라 그 종교에 대해 절대적인 맹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다 인정하는 정통 종교라고 하는 점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정통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우리가 믿는 신앙이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표면적으로 보면 그럴 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내면 면면을 보면 우리도 우리가 믿는 이 세상에 단 한 분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엄밀하게 살펴보면 우리도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단순히 성당만 다니고 미사 전례와 같은 외형적인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앙을 하게 된다면 우리도 진실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기도가 과연 제대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얼마나 자신할 수 있을지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본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낙제 점수에 가까운 사람이 수두룩백백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성당을 다니며 하느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게 허다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우리는 사이비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사이비에 빠진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굿뉴스 자료실에 나온 자료 중에 주호식 신부님께서 올리신 글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신앙도 공부가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려움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이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달리 말하면 하느님을 알려고 또 예수님을 알려고 공부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대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통 종교를 선택하고도 천운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자칫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항상 견지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맹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에 대해 누군가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믿는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을 아주 독실한 믿음이라도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건 오히려 예수님과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닙니다. 아주 저명한 신학자가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올까요? 바로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바로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을 우상숭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사실 조금만 고민해보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신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더 충격적인 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시편 말씀을 한 번 더 잘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또 행복한 사람은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도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복론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그렇게 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하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바로 그들은 이미 오만한 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길에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서 전력투구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하늘나라는 그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곳일 것입니다. 이런 모든 언급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저는 오늘 복음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나자로와 부자 이야기 복음이지만 이 복음을 통해서 다른 면을 하나 진지하게 살펴보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들려준 말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부자는 자기 형제들만은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곳에는 오지 않게 하고 싶어서 그런 청을 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아브라함할아버지로부터 돌아온 답변에 우리는 깊은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설령 부자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하여도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실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그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믿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 속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만큼 신뢰하지 못하면, 믿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자가 됐든 부자가 되지 않았든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계신 그런 천상의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일반적으로 아는 그런 내용을 조금 벗어나 이런 면도 한번 묵상해본다면 의미있는 묵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그 말씀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그 의미가 무슨 깊은 뜻을 담고 있는지 다시 깊이 고민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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