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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승국 스테파노신부님 살레시오회 : 용서 안에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작성자박양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21 조회수1,243 추천수5 반대(0) 신고

제자단의 대표로 살아가던 베드로 사도의 하루하루는 여간 팍팍한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랴, 부족한 동료 제자들과 함께 보폭을 맞추랴, 상당히 힘겨웠을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 가운데 미운 사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 형제는 혹시 나중에 배반자가 된 유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애제자’로 여기면서 수제자 베드로와 늘 경쟁, 대립 관계로 서 있던 요한 사도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뒤처지는 동료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경쟁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밉고 괘씸하던지 여러 번 다투기도 하고 감정이 폭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홀로 해결이 안 되다 보니 예수님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개인 생각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8장 21절)

  

왜 베드로는 하필 7이라는 숫자를 내세웠을까요? 일곱 번이면 베드로 자신에게 있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큰 양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일곱 번으로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큰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 큰 악성 종양을 하나 달고 산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 종양은 우리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훼손시킵니다. 우리는 그 종양으로 인해 이웃도 괴롭고 자신도 괴로운 일종의 ‘지옥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조금은 무리가 되는 것 같은 강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삼시 세끼 밥 먹듯이, 매 순간 숨을 쉬듯이, 그렇게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나도 살고 그도 살며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용서 안에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형제끼리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용서 안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라는 하느님의 초대, 혹은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깊은 내면의 평화와 기쁨 속에 천국 같은 하루를 살 것인가? 아니면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글거리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불붙는 지옥 속에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용서가 힘겨울 때마다 그 숱한 우리의 죄와 배반을 끝까지 인내하시고 용서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바라시는 바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에 대한 쿨한 용서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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