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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 사순 제4주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26 조회수960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는다.

 

 

 

 

 

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7

대속죄적인 죽음으로 가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 부활하시어 그 사랑을 이제와 영원히 늘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살면 새로운 창조물이 된다.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을 체득하고 그 사랑에 답하여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그분을 위하여 살려고”(15) 작심하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창조물이다. 그리스도인의 탄생은 태초의 천지창조와 맞먹는 창조사건이란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할례나 세속적 판단기준(16) 따위 묵은 것은 지나갔다”.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이 되어야 비로소 묵은 것은 지나가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사람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바오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이면 누구나 이미 새로운 창조물, 새 사람이 된다. 종말론적 미래가 앞당겨져 현재화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곧 더없이 아름다운 글귀로 종말 선취 신앙을 피력할 것이다. “‘알맞은 때에 너(의 기도)를 들어주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와주었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알맞은 때이며,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6.2)

 

18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죄적 죽음을 설명할 때 화해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18-20; 로마 5,10-11에서 갑자기 이 개념을 도입했다. 왜 그랬을까? 알다시피 바오로는 오랫동안 코린토 교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코린토 후서와 로마서를 집필할 무렵에 모처럼 코린토 교우들과 화해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이 때에 화해 개념을 도입하여 그리스도와 대속죄적 죽음을 설명했다.

 

코린토 교우들과 수평적 화해를 한 것을 계기로 해서 비로소 하느님과의 수직적 화해론을 전개했다고나 할까. 신약학계에서는 바오로가 이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아니고 교회 전승에서 물려받았다고 본다. 단지, 전승의 형태에 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19ㄱㄴ절을 전승요소로 보는 설이 강하다.

 

18-21절의 내용을 간추리면, 하느님은 화해의 주제자시오, 그리스도는 화해의 중보자시며, 사도들은 화해의 봉사자들이다.

 

바오로는 하느님 중심 신앙을 지닌 사람이다. 18-21절에 나오는 하느님을 눈여겨보라. 하느님은 예수의 대속죄적 죽음을 주재하시고(19.20).

 

그리스도께서는 대속죄적인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를 가능케 하신다. 18절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우리가 원수이던 때 하느님의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로마 5,10)는 뜻이다.

 

19ㄱ절의 그리스도안에서 대속죄적 죽음으로 화해가 이룩되었다는 뜻이다. 19ㄴ절의 저들에게 저들의 범법들을 따지지 않으시고는 시편(LXX) 31.2를 원용한 글귀로서, 그 뜻인즉 하느님이 인간들의 죄들을 인간에게 추궁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21절의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고는 어떻게 해석하든 무죄한 예수로 하여금 죄를 뒤집어쓰게 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사도들에게 화해의 봉사직을을 주셨다. , “화해의 봉사직을주셨다. , “화해의 말씀을 맡겨 주셨다”(19), 여기 화해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2.17). “십자가의 말씀”(1코린1.18)과 같다. 화해의 말씀은 복음인 것이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의 연관문 갈라 3.13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고 하는데, 그 뜻인즉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죄로 만드시고속죄의 제사로 만드시고라고 풀이하는 주석가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풀이를 배척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렇게 풀이하는 이들은 그 근거로,칠십인역 레위기에서 속죄 제사를 그냥 죄로 약칭한 사례들을 내세운다.

 

하느님의 의로움이라는 표현은 바오로 친서군에 열 번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구원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까닭에, 그분은 의로우시고 또한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 곧 의인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나? 율법의 행업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바오로는 확신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이 확신을 상론했다. 바오로의 불가능하고, 오직 타력구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라 하겠다.

 

인간이 자신의 공덕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천주교회에서는 의화론 또는 성의론 이라 하고, 개신교회에서는 의인론, 인의론, 또는 칭의론이라 한다. 우리라나라 개신교계 그들을 보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의롭다 함을 인정받는다같은 표현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그 신학적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말 어법상 도대체 이런 표현들이 성립될 수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

15,11-32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수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고유사료에서 옮겼을 것이다.

이 비유에는 대조적 인물 들이 나온다. 12-24절에는 작은 아들, 25-32절에는 큰아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비유의 역점도 두 번 있으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온 작은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24),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큰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의 모습(32)에 역점이 있다. 이 비유말고도 예수께서는 종종 두 부류의 인물을 대조하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를 들면 바리사이와 세관원 예화. 두 아들 비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 등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계기와 이 비유의 뜻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자주 세관원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심히 못마땅히 여겼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는 11-32절의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비유의 역점들을 따라 그 뜻을 풀이하면, 하느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반기신다는 것이요(24),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하느님의 이 기쁨에 마땅히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32).

 

15

유다인들은 돼지를 매우 불결한 짐승으로 여겼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꼴이 말이 아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상을 암시한다.

 

16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는 지중해변에 십여 미터까지 자라는 나무로서 그 열매는 가축사료로 이용되었다.

 

18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되돌아가는 것은 회개를 의미한다. 유다인들은 회개를 일컬어 되돌아가다라 한다. 사실 회개란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방향전환이다.

 

24

하느님을 등진 인간은 죽은 몸이요 하느님께 되돌아간 몸은 다시 사는 몸이다. 죄는 죽음을 초래하는 중병이요 회개는 새 삶을 잉태하는 선약이다.

 

29

큰아들의 말투는 18,11-12에 있는 바리사이의 기도문과 흡사하다. 또한 큰아들이 제 아우를 가리켜 아버지의 이 아들이라 하는데, 이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아들은 될지언정 결코 제 아우는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의 이 아우”(32)라고 수정하여 그 둘이 분명히 형제간임을 밝힌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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