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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26."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26 조회수1,832 추천수3 반대(0) 신고

 

루가 15, 1-3, 11-32(사순 4 주일)

오늘은 사순 제 4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새 사람’, ‘새로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 과정이 끝나고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된 땅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게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세상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을 말합니다. 곧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새로운 피조물’과 ‘새 것’으로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2코린 5,17), 우리를 ‘화해의 직분’(2코린 5,18)과 ‘화해의 말씀’(2코린 5,19)을 맡기시고, ‘그리스도의 사절’(2코린 5,20)로 파견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음(2코린 5,21)을 말합니다. 곧 ‘새 사람’으로의 변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새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지고한 사랑과 자비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나누어 받아 집을 떠나 방종한 생활 끝에 모든 것을 탕진한 작은 아들은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 내고서 말합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루카 15, 8 참조).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은 아들의 ‘뉘우침’‘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마침내는 돼지 치는 품팔이꾼이 되어서야 ‘내 아버지 집의 품팔이꾼들에게까지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큰 아들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그에게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사랑을 깨우쳐줍니다.

한편,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멀리서 보고서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종들에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버지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혀주셨듯이(창세 3,21), 그는 ‘가장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의 “자비로우신 아버지”라는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아들의 새로운 탄생을 모태에 묻고 있는 갓 태어난 어린애의 머리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야말로 고통 속에서 탄생하는 깊고 깊은 사랑과 선입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도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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