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사순 제4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3-28 | 조회수1,02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파스카 성야 세례 서약 갱신 후 따름 노래).> -.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는 것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복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주해 안식일에 베짜타 못에서 이루어진 중풍병자 치유 이 대목은 공관복음에도 나오는 중풍병자 치유사화를 안식일 논쟁사화와 더불어 확대 보도한다. 이 두 사화가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는 설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치유행위가 이른바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의 유다인들의 충돌로 발전된다. 특히 예수가 안식일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도하는 대목이 구조상 예수의 치유행위와 안식일 논쟁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흡사한 구조를 태생소경 치유사화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그리스도론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절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긴다. 7장에서 초막절이, 10장에선 성전봉헌절이, 11-12장에서 예수의 마지막 해방절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축제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축제보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예수 자신의 계시 말씀과 행적에 더 역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동기를 시사하는 뜻에서 “유다인들의 축제”가 언급된 듯하다. 2절 “양 문”은 예루살렘 성전 북쪽 성문(느헤 3,1.32;12.39 참조). “베짜타”는 어떤 사본에는 “베테스다”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쿰란 문헌에 의거하여 이 명령에 신빙성을 두기도 한다. 또한 베싸다가 히브리어보다는 아람어에 따른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4절 일부 사본에는 3절의 상황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주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철렁거리게 했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들어가는 이는 어떤 병이든지 낫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일려진 일종의 민간신앙에 따른 설명으로 여겨진다. 못에 새로운 물이 갑자기 흘러들어와서 물이 출렁거렸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5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38년간 헤멘 방랑생활과 관련지어 상징적인 뜻으로 해석하려는 학자들도 있으나, 오래된 고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예수의 치유행위가 놀라운 기적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6절 “본다”는 예수의 의도적 행동을 “안다”는 예수의 신적능력을 가리킨다. 예수의 물음은 치유기적을 염두에 둔 의사표명이다. 예수의 주도권이 시사된다. 7절 예수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반응이다. 병자는 예수가 자기를 재빨리 들어다가 못에 넣어 주겠다는 줄로 알아들었다. “주님”은 신앙고백적 의미가 아니라 “선생님”에 가까운 존칭이다. 8절 공관복음의 중풍병자 치유사화에서 언급된 예수의 권위적 말씀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 9절 예수의 권위에 의해 치유가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특히 “즉시”란 표현은 예수의 말 한 마디로 치유되었음을 강조한다. 본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침상을 들고서 걸어갔다”라는 표현에 병자가 중풍병자였음도 시사된 셈이다. 10절 유다인들은 치유된 자가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을 안식일 금지조항(39가지) 가운데 하나로 본다(예레 17,21-22 참조). 11절 치유된 자는 자신을 고쳐준 분의 권위를 내세우는 듯하다. 단순히 책임전가만 뜻하지는 않는다. 13절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는 이름을 몰랐다는 뜻이다(15절 참조). 사람들이 많이 붐벼서 빠져나갔다는 뜻이다(6.15 참조). 14절 예수의 이 경고는 죄가 병을 일으킨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을 전제한다. 그러나 예수는 치유뿐 아니라 죄의 용서까지도 알리고자 한다. 또한 이 말은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 치유가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 구원행위의 외적 표정으로 시사된다. 따라서 “더욱 나쁜 것”은 죄의 벌로서 육체적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한마디로 “생명”(영생)을 잃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더욱 나쁜 것”은 문맥상 “이보다 더 큰 일”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15절 치유된 자의 밀고로 인해 예수와 유다인들의 논쟁이 야기되었음을 시사한다. 치유된 자의 배은망덕도 시사된다고 볼 수 있다. 16절 유다인들이 예수를 박해한 원인은 안식일에 행한 예수의 치유기적 자체보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 있다. 원문에서 반과거형으로 표현된 “박해했다”와 “행했다”가 이런 의미를 잘 시사한다. “그런 것”이란 표현도 안식일을 어기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물론 현 문맥에서는 치유된 자로 하여금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걸어가게 한 예수의 책임도 내포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