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1 사순 제4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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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3-30 | 조회수80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주님,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 주님께서는 모세의 예언을 들으시고,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신다. 복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주해 예수를 뒷받침하는 증언들 이 대목은 앞서 언급된 “아들의 권한”을 아버지 하느님의 증언으로 명시한다. 아들 예수를 위한 아버지의 증언(31-30절)과 그 증언이 불신에 대한 윤리적 재앙(31-47절)에 관한 내용으로 나눠질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증언”이란 표제어로, 둘째 부분은 “영광”이란 표제어(41절)로 시작되는 것도 특징이다. 또한 구약성경의 하느님 말씀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유다인들의 그릇된 태도가 지적됨으로써 예수의 하느님, 곧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그들과 대조를 이룬다. 즉,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분이라는 것(43절)이 재확인되고 강조된다. 예수의 이러한 인격을 뒷받침하는 증인들로서 구약성경 모세. 세례자 아버지의 “증언”, 예수의 “일들”이 언급된다. 31절 자기 자신을 위한 증언은 신뢰 할 수 없고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일반 법정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예수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 때 예수는 달리 해석한다. 즉, 자신은 참된 증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그 증언도 신뢰할 수 있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또는 자신의 정당한 권한을 확증하고자 이런 법정의 말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6.17; 신명 17.6; 19.15 참조). 32절 “아버지” 가리킨다(37절). “아버지”의 증언은 직접적 증거가 아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그 증언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 오로지 예수만이 그 증언이 참되고 자신을 위한 증언임을 안다. 예수는 그 증언을 자신의 말과 일 안에서 확신하기 때문이다(36절 참조). 33절 셰례자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 앞에 행한 증언을 연상시킨다. 저자가 처음부터 세례자의 증언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이 세례자의 증언에 함께하시고 세례자가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했다면, 그의 증언도 “진리”를 위한 증언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고 빌라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진리”는 예수를 통해 밝혀지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다. 예수 자신이 또한 “진리”다(14.6). 따라서 세례자는 그런 진리 계시에 봉사함으로써 “진리에 대하여 증언한” 자다. 34절 예수 자신은 하느님의 증언 외에 그 어떤 증언도 필요없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례자 증언의 가치가 상대화된 셈이다(36절 참조). 어떤 사람의 증언도 필요없는 예수 자시이 세례자의 증언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유다인들”이 구원받도록 하는 데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즉, 세례자의 증언이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이기 때문이다(1.17). 35절 “빛”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표상어이기 때문에, 세례자를 “등불:로 표상한다(1.7-8 참조). 세례자의 증언을 한번도 제대로 받아들이거나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세례자가 “등불이었다”란 말은 “잠시 동안” 세례자에게 긍정적으로 취한 사람들의 태도와 관련된 표현이다. 즉, 세례자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증언활동과 관련된 표현이 아니다. 세례자는 항상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36절 세례자의 증언보다 “더 중대한 증언”은 예수가 행하는 일들. 곧 계시사건들이다. 이 “일들”을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이룩한다. 이 “일들”이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언한다. 이 “일들”은 예수가 이미 이룩한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가 지상에서 이룩해야 할 것들도 총칭한다. 공관복음의 “기적”이 요한복음에서는 “일”과 “표징”으로 표현된다. “표징”은 행동으로 드러난 계시로서 “일”의 또 다른 면을 묘사할 따름이다. 37절 아버지께서도 친히 예수를 위해 증언하신다는 점이 강조된다. 예수의 ”일들“을 통해서도 아버지께서 증언하시지만(36절) 여기서는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몸소 ”증인“(32절)으로 명시된다(1요한 5.9 참조). 시나이 산 신현사건을 인용하여 환상에 젖은 유다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지적한다. 누구도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보거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습”과 “목소리”는 한 인격체를 나타내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계시자를 부인함으로써 그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시나이 산에서 계시하신 하느님이 바로 그 계시자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38절 유다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계시자,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3.34). 이 “하느님의 말씀”은 문맥상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39절). 39절 예수는 유다인들이 성경을 경거하게 대하고 또한 열심히 두루 탐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토라가 모든 구원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유다인들의 사고에 일치한다(비회 17.11; 45.5; 바룩 4.1). 그러나 예수에게 오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40절 참조). 예수만이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6.35; 8.12). 유다인들이 열심히 두루 탐구하는 바로 그 성경도 예수를 위해 증언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경의 각 말씀은 예수에게서 이루어지고, 성경은 바로 예수에 관해 말한다. 성경과 예수의 말씀이 일치하며(2.22), 예수 부활의 관점에서 성경의 신비스런 말씀들의 뜻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성경의 핵심이요 목적이다. 이 구절은 초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론적 성경 해석의 절정에 이른다. 40절 예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인데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6.35 참조). 41절 예수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없듯이(34절)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자 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즉, 예수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는다는 것이 시사된다(7.18). 42절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뜻한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됨을 드러내는 사랑이다. 유다인들이 설령 하느님을 알더라도 그들에게는 이러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들추어낸다. 43절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이다(23절 참조).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란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받고서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예수의 “일들”은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10.25 참조). “자신의 이름으로 온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다”와 대칭을 이루며, 거짓 예언자들을 지칭한다(신명 18.20). “다른 이”도 “나”와 대칭을 이룬다. 따라서 43ㄴ절의 내용과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진 예수의 파견이 더욱 강조된다. 즉, 예수만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유일무이한 메시아임이 “나는 ...”이란 표현과 함께 예수의 입을 통해 역설된다. 44절 유다인들의 윤리적 잘못을 지적한다. 즉, 자신들의 영광 또는 인정을 하느님을 통해 찾으면서도 정녕 하느님께 드릴 영광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백 정식에 속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란 표현과 더불어 더욱 거세진다. 45절 유다인들의 “생명의 율법”을 준 모세에게 희망을 걸어 온 것은 모세가 구원의 보증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자기네 “대변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모세가 오히려 그들에게 “고발자”가 된다고 위협적인 말을 한다. 모세는 그들을 고발하기 위해 이미 와 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에 관한 모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46절 모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예수를 위한 증인이 되었다(신명 18,15-18;요한 6.14;7.40.52 참조). 47절 모세오경은 예수의 “말”에 대한 증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모세오경을 통해 예수는 “약속된 메시아”임을 알고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1.45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저는 음료수를 자주마시는데 포도봉봉을 마실때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고 복숭아를 마실때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관우,장비가 복숭아나무밭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던 도원결의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인가 해서 같이 마시는 동료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도 웃으면서 그렇다고 합니다. 또한 고양이를 끔직히도 좋아하는 동생을 보면 가톨릭 성가 “~고양 이시며 ~”라고 나오는 성가 가사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성가에 고양이가 나오는가 해서 사전을 찾아 봤더니 “고양”이란 어린 양의 “고(羔)”자에 양은 큰 양인 “양(羊)”을 뚯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기도가 잠시도 멈출때가 없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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