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사순 제4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01 | 조회수1,27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이 악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 한다고 한다.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주해 40절 예수가 모세에 의해 약속된 예언자, “종말론적 예언자”라는 이 고백은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서만 있다. 요한복음은 “빵의 기적”을 메시아로서 예수의 자기계시가 이루어진 “표징”으로 설명한다. 예수의 신비를 드러내는 이런 고백 형태는 요한복음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세상에 오기로 된 분”이라는 표현과 “그 예언자”란 칭호도 요한복음의 주된 관심사다. 41절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구원자, 곧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를 가리킨다. 당시 군중이 예수를 “그 예언자” 또는 “그리스도”라고 일컬었다는 것은 예수를 기다리던 구원자로 알아보았음을 뜻한다. 예수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점에서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27절과 다른 관점이다. 유다인들은 예수가 보잘것없는 고을 나자렛 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공박했다(1,45-46 참조). 42절 예수의 계시 말씀이 끼친 영향력과 그에 대한 군중의 반응을 보여준다. 분열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군중 가운데 아직 없었음을 시사하다. 예수에 대한 믿음만이 충돌과 분열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9.16: 10,19-21참조). 유다인 메시아관에 따른 표현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다윗의 후손중에서”와 같은 표현은 구약성서에 없으나 비슷한 표현은 더러 있다. 메시아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미카 5.1에, 베들레헴이 다윗의 마을이라는 것은 1사무 20.6에 근거한다.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라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43절 예수의 계시 말씀이 끼친 영향력과 그에 대한 군중의 반응을 보여준다. 분열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군중 가운데 아직 없었음을 시사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만이 충돌과 분열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9.16; 10.19-21 참조). 44절 그들은 예수의 자기계시를 어느 정도 이해했으나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신성모독으로 몰려 했음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예수에 대한 불신이 강조된다. “그분의 시간”은 성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부께서 허락하시는 그 “시간”이 예수에게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는 계시자로서 아직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시간”에 있고, 하느님이 예수와 함께하고 계심을 저자는 설명한다 (30절 참조) 45절 32ㄴ절 참조. 46절 예수의 인격과 권위있는 가르침이 하인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예수를 잡아올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일부 사본에는 “그렇게” 대신 “이 사람처럼”. 49절 바리사이들의 오만이 시사된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는 “시골뜨기”를 뜻하는 랍비들의 암 하아레츠에 근거한 표현이다. 랍비들은 특히 십일조와 정결례 법을 지키지 않느 유다인들을 증오하고 천시하는 뜻으로 암 하 아레츠라고 칭했다. 바리사이들이 하인들에게 욕한 이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리사이들 눈에는 그들이 율법도 모르고 지키지도 않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욕한 것이다. 50절 3,1-2 참조. 51절 예수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정당하게 처리되기를 니고데모는 바란다. 52절 바리사이들의 생각에서 벗어난 니고데모에 대한 격정적 반응이다. 갈릴래아를 천시하는 생각도 시사된다. 성경 내용으로써(42절 참조) 니고데모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하려는 시도다. “예언자” 대신 “그 예언자”로 언급된 사본들도 있다. 이에 따라 이 구절을 주석하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요한복음의 현 문맥에도 맞다. 갈릴래아에도 이미 여러 예언자가 있었다. 여기서 “예언자”는 메시아적 예언자. 곧 “그 예언자”를 가리킨다(40-41절 참조). 53절 청중은 예수의 가르침을 성전에서 듣고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는 상황설명이다(2절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족보를 따라서 투표할까 합니다.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는 것으로 투표를 하다보니 경상도와 전라도가 나뉘어서 고질적으로 나라가 나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성인님의 증조 할아버지가 저의 8대조이신데 그분이 김진후 비오님이십니다. 저는 도지사에서 파조가 된 안경공파의 자손이었다가 이제는 김진후 비오님께서 성인공파의 파조가 되었기 때문에 신앙상의 족보로서도 저의 선조가 정이 더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므로 성씨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릅니다만 요셉 성인님이 양부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는 김해김씨 안경공파가 아닌 성인공파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지사만큼은 여기로부터 파조가 되었으므로 김씨 성을 가진분에게 투표를 하고자 합니다. 전라도는 한자는 다르지만 벌거벗은 몸을 전라라고 합니다. 에덴 동산인지 아니면 가난해서 그런지 하여튼 전라도 하면 다 벗은 몸으로 살고있는 에덴동산이라 여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