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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브리엘 신부님 묵상글을 읽고서.....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03 조회수1,168 추천수3 반대(0) 신고

 

조금 전에 가브리엘 신부님의 월요일 묵상글을 보았습니다. 요즘 마음이 개인적인 일도 그렇고 신앙적으로 주변에 우울한 일도 있고 해서 마음이 심란해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던 차에 신부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당 주일미사 강론에도 신부님께서 짤막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해서 말입니다. 복음에 간음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것도 현장이었습니다. 왜 하필 여인만 붙잡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이 죄를 짓고서도 왜 여인만 죄를 묻기 위해 그당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여자를 창조했을 땐 아담의 갈비뼈를 이용해서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여자의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존중해주고 배려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여자의 몸에서 열 달을 누구나 지내게 됩니다. 태아의 성별을 떠나서 처음부터 우리는 여자의 보호 아래서 생명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근원을 봐서도 우리는 여자를 특별히 존중해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과부와 고아는 잘 보살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과부는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지만 그 이유는 그래도 여자는 생물학적인 이유로도 남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물론 남자보다도 강한 면도 많습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정신 연령도 남자보다도 높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힘으로는 남자보다도 연약한 면이 많이 있기에 아마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보더라도 인조 때 청나라에 많은 여인이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이때 나중에 조선에 들어와서는 여인들이 정절이 더렵혀졌다고 해서 시가댁에서 인조 임금에게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인조는 이걸 허락하게 되면 많은 여인들이 혼자되는 상황을 염려해 허락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경우는 이게 되지 않으니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칠거지악을 핑계로 해서 상소를 올리니 더는 임금도 그런 이유로는 거부를 할 수가 없기에 허락한 역사도 있습니다. 이런 면을 봐도 얼마나 슬픈 현실이었겠습니까? 어찌 그 여인이 잘못이 있었겠습니까? 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게 어찌 그 여인의 잘못입니까? 그건 나라를 지키는 남자의 전적인 책임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도리적인 책임은 남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때 많은 여인들이 목숨을 끊었던 아픈 역사를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원인에는 나라의 책임이 있었던 것처럼 신앙 공동체에도 그런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에도 남자도 힘든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도 있지만 특히나 여자의 혼자 몸으로 아니 혼자는 아니더라도 가장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가정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본당에 충실하게 봉사를 오랜 세월 동안 했지만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공동체에서 약간 어떤 면에서 소외시키는 면을 봤습니다. 

 

물론 의도적인 소외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가 복음정신에 충실하려면 특히나 이런 분들에게는 공동체가 그런 분을 품어안아야 하는데 지금 보면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말로만 복음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늘 하지만 실제로는 복음정신을 실천하기는커녕 거의 무관심한 상태로 일관하고 있는 교회 현실을 보니 맘이 참 아픕니다.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참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오랜 세월 본당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고 했는데 누구 하나 따뜻하게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 제가 누가 위로를 했는지 여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보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사람 간에 있는 상처도 물론 큰 상처로 남을 수 있지만 부분적이더라도 공동체에서 받은 상처는 더 큰 상처로 남습니다. 

 

한 공동체 내에 있는 형제자매 간에도 서로의 아픔을 품어주지도 못하는데 어찌 우리는 어둠인 세상을 과연 복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부만이 보호의 대상이 아닙니다. 실제 홀로된 여인이라면 과부에 준하는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세상을 복음화하기 이전에 먼저 본당 공동체가 복음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화는 선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복음화의 정신을 구현하는 삶을 사는 것도 복음화가 될 것입니다. 그 정신의 밑바탕에는 사랑이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랑이 없이 맹목적으로 세상을 복음화하자는 구호는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순이 아니더라도 항상 소외 계층을 잘 보살피자고 하는 말을 늘 하지만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을 신경쓰지 못한다면 가브리엘 신부님의 말씀처럼 교회가 존립하는 의미가 무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모든 사람은 계층에 상관없이 다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나 여인은 더더욱 보호를 해야 합니다. 그게 하느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을 때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또 하나의 남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는 바입니다. 저는 공동체에서 아직까지도 말단 사원처럼 근 십 년 동안 막내와 같은 위치에 있어서 어떻게 주장할 입장이 아니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 혼자만 마음으로 전전긍긍합니다. 제가 여자라면 어떻게 한번 해보겠지만 여자가 아니라서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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