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 사순 제5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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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07 | 조회수1,41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그의 곁에 계시니,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고 한다.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주해 31절 유다인들의 이런 반응은 예수에 대한 불신을 가리키고, 예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만 몰아세웠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란 말로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의 의도와 적개심이 계속되고 있음도 보도된다. 32절 예수의 호신보다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좀더 깊이 생각하도록 이끄는 데 역점이 있다. 특히 예수가 보여준 “많은 일들”이 “좋은 일들”로 강조되고, 아버지로부터 위임된 일들로 평가됨으로써 예수가 하느님과 함께 깊은 친교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증언된다. 33절 유다인들은 예수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예수의 논거에서 오히려 예수를 비난하고 신성모독죄로 몰아세운다. 이리하여 예수에 대한 유다인들의 불신이 더욱 확고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인격에 대한 유다인들의 이런 비난은 복음서가 씌어질 당시에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진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신성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다인들의 격렬한 비난과 논박이 당시 유다인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34절 “유다인들”에 대한 거리감이 엿보이는 표현이다. 랍비들은 “율법”이란 말로 유다인 경전(구약성경)전체를 가리킨다. 시편 82.6 참조. 유다인들의 예수의 말과 일들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하게 때문에 이제 랍비들의 방식대로 성경 말씀에 의거하여 논증이 제시된다. 이런 논증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논쟁이 벌어진 저자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35절 인용된 성경 말씀(34절)을 더욱 분명하게 해석한다. 하느님은 율법을 당신 말씀으로 받아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칭했다는 뜻이다. 이런 해설은 랍비들의 문헌에서도 입증된다. 시편 82.6에서는 판관들을 “신들”이라 칭한다. 하느님을 대표하는 사람을 “신”이라 칭하는 사례를 구약성서의 다른 대목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신들”로 칭해진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당신 말씀, 곧 당신 계시의 전달자로서 파견된 자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뜻이다(36절 참조). 7,23과 맥락을 같이하는 랍비들의 논쟁방식이다. 요한복음에 있어 하느님 아들의 종말론적 파견은 곧 구약성서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 약속의 성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예수를 통해 예수와 함께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36절 하느님의 아들로서 파견된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아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아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알려지기 위해 파견된 자를 무장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성령으로 무장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무장된 하느님의 보고 들은 것을 “하느님의 거록한 분”으로서, 곧 성령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말씀들을 권위있게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파견된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는 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들”로 정해진 자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하느님의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성모독을 하지 않고서도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칭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께 대한 예수 자신의 유이무이한 관계를 표시한다. 37절 예수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들이고, 그 일들은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여기서 “믿는다”란 말은 예수에게 신뢰한다는 것을 뜻한다. 38절 불신에 찬 유다인들의 완고함을 지적한다. 즉, 예수가 설령 그들 자신에게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예수가 드러낸 “일들”만이라도 진지하게 보고서 믿음을 가졌어야 한다는 뜻이다. 믿음의 내용과 역할이 언급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란 말이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습니다”라는 말로 표현된다. 모두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일치된 친교관계를 뜻한다. 이런 예수는 바로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말씀과 표징 내지는 일들로써 계시하는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께달아 알게 되고” 또한 예수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예수와의 인격적 친교를 나눔으로써 더욱 견고케 되고 동시에 성숙된 믿음으로 완성되어 안다. 예수는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14.6). 39절 예수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8.29 참조)그들의 폭력을 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7.30.44 참조).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물러가신 예수 이 대목은 예수의 예루살렘 체류와 라자로 소생사화를 연결한다. 예수는 유다인들의 폭력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39절) 요르단 강 건너편에 와서 잠시 머물다가(40절) 라자로가 묻힌 무덤으로 간다. 40절 요르단강 동편을 가리킨다. 1.28에 따르면 베다니아를 가리킨다. 예루살렘 부근 베다니아의 이름은 같으나 장소는 다르다. 11.6에 따르면 예수는 잠시 피신했을 뿐이다(11.8.16 참조). 41절 “요한이 표징”은 기적에 대한 요한복음의 표현이다. 1.19-34; 3.28 참조. 예수가 행한 일들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대한 확증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진실”이란 표현은 세례자를 진리의 증언자로 인정했다는 것도 시사한다((5.33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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