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주간 화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11 조회수2,209 추천수8 반대(0)

코네티컷 한인 성당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립니다. 신부님과 공동체 분들을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았습니다. 일기예보에는 비와 천둥 그리고 벼락이 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걱정하면서 출발하는데 하늘은 흐리고 안개는 끼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해가 나오며 오히려 조금 더웠습니다. 일기예보는 다행히 맞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밤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비와 천둥 그리고 벼락이 있었습니다. 일기예보는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과 기술의 예측입니다. 인공위성과 컴퓨터는 거의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자연현상을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도 아직은 100%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서에 예언서가 있습니다. 예언서는 일기예보처럼 앞으로 드러날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는 무속인들처럼 사람의 앞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해주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사람의 미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의 직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미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느님의 자비는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의 자비는 이방인이었던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갈망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누가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레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이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삶이 전혀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또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희망을 버렸던 유다는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다는 쓸쓸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깨끗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시켜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또한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