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2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21 | 조회수1,41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예수님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3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6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8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주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의회에서 증언하다. 4.1-22는 베드로와 요한의 제보, 교회의 성장 최고의회 심문, 앉은뱅이었다가 나은 사람의 나 순으로 짜여 있다. 최고의회 심문 내용은 앉은뱅이 치유와 사도들의 설교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의 이름이 두 가지 모두에 관계된다. 앉은뱅이는 예수의 이름이 두 가지 모두에 관계된다. 앉은맹이는 예수의 이름이 낫게 되었고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발설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 1절 성전 경비대장은 성전 경비와 질서를 유지하는 총책임자로서, 대제관 다음으로 높은 제관이 그 직책을 밭았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내세워 죽은이들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구약의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들이 처형한 나자렛 예수의 부활이라는 실체였다. 동시에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표징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는 더욱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3절 최고의회는 저녁에 즉시 소집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절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모인 이들은 120명 가량이엇고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3,000명 가량이었으며 “주께서는 그 모임에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늘려 주셨다.” 이제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를 듣고 장정 수요만도 5,000명 가량이 입교한다. 루카는 교세가 날로 확장해 간다는 사실을 점진적으로 묘사한다. 5절 사두가이계 고급 제관들, 평신도 원로들, 그리고 바리사이계 율사들이 최고의회를 구성했다. 정원은 71명이고 의장은 대제관이다. 70년 이후에는 바리사이계 율사들이 추축이 되어 암니아에서 최고의회를 새로 구성했고, 2차 독립전쟁 이후에는 갈릴리 지방의 우사- 벳 세아림- 세포리스-티베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6절 대제관은 원래 종신직이었으나 헬라시대,로마시대에는 정교간 알력과 권모술수로 파직, 면직되는 일이 잦았다. 가야파는 안나스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파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18-36년에 봉직했으니, 사도시대의 현직 대제관이다. 요한과 알렉산드로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다. 7절 “이런 일”은 어떤 일인가?앞 문맥 2절을 보면 사도들의 예수 부활 설교이고, 뒷 문맥 9절을 보면 앉은뱅이치유 사건이다. “어떤 일”은 설교와 치유를 합쳐 사도들의 활약상 전부라고 보면 무난하다. 8절 베드로는 자력으로가 아니고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한다”, 예수를 비롯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세례자 요한, 성모 마리아, 엘리사벳, 즉가리야. 사도들, 베드로, 예루살렘의 교우들, 스테파노, 바르나바, 바오로 등이다. 11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구약성서 가운데 시편 118.23를 인용한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류구원의 사건인 까닭에, 구약성서 어디엔가 이 사건이 예언되었을 것으로 믿고 해당 성서 단락들을 찾았다. 즉,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구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듯한 구절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이 찾아낸 한 구절이 곧 시편 118.22(-23)이다. 그 뜻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같이 여겨 죽였지만,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시어 모퉁이의 머릿돌마냥 가장 중요한 사람, 곧 구원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12절 명시적으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이 확실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중에 그분을 믿는 사람도 구원받는 다는 것이 신학계의 통설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정신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구원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견해다. 루카는 신약성서 저자들 가운데 가장 폭넓은 구원관을 가졌지만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동양의 종교들 안에서도 구원의 표지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에게 알려진 세계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뿐이었고 그가 만난 종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다신교적 신앙뿐이었기 때문이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주해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21장은 저자의 후계자들 이른바 요한학파가 복음서의 최종 편집 때 첨가한 부록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티베리아 호숫가 발현사화가 교회론적, 사목적 중점을 두고서 전개되고, 일종의 결말로서 복음서 증언의 진실성이 강조된다. 이 대목의 발현사화는 앞의 두 발현사화와 여러 차이가 있다. 우선 장소가 갈릴래아의 티베리아 호숫가 예루사렘의 어느 방으로 구별 된다. 그리고 앞의 두 대목에서는 제자들이 한데 모인 상황에서 부활한 예수의 발현이 이루어진 데 반해, 여기서는 오히려 제자들이 흩어진 상황이 돋보인다. 또한 문맥과 내용상 상충되는 점도 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부활 발현을 두 차례나 체험했으므로 부활한 예수를 즉시 알아볼 수 있었을 법한데도 이 대목에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오히려 앞에 보도된 두 사건의 전단계인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에 직결되기에 더 적합한 인상을 준다. 아무튼 앞의 두 대목과는 독립된 전승자료임에 틀림없다. 이 대목의 발현사화는 두 전승이 섞여있다. 제자들이 예수로 인해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기적과 부활한 예수와 함께 나는 식사 이야기다. 그리고 제자들이 두 번에 걸쳐 그분을 몸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상응하여 부뢀한 예수를 두 번이나 알아본 것으로 보도된 점도 유의해 볼 만하다. 1절 “제자들에게 다시”는 부활한 예수의 또 다른 발현을 시사한다. “드러내 보이셨다”는 예수의 자기계시로서 부활발현을 특징짓는다. 2절 여기서 열거된 일곱 제자는 “층만한”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 “일곱”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고, 또한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시사한다. 3절 고기잡이 기적과 관련된 상황설명이다. 당시 티베리아 호수에서는 보통 밤에 고기를 잡았다. 낮에는 고기들이 호수 바닥에서 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4절 제자들이 고기잡이하던 상황에서 부활한 예수의 발현상황으로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20,14; 루카 24.16 참조. 5절 직역하면 “어린애들아!”신뢰가 두터운 관계를 시사한다. 요한 교회에서만 사용된 특별한 호칭인 듯하다. 여기서는 문맥상 의역했다. “생선”은 원래 빵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구운 고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먹을 것(생선) 좀 가지고 있소?”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 문맥에서는 생선을 잡았는지를 묻는다. 원문의 표현을 살리자면 오히려 “생선을 잡지 못했소?”라고 의역할 수 있다. 일종의 기적사화 묘사다. 부활한 예수는 이제 기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 기적은 사람받는 제자가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한 표징이다. 6절 행운의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잡을 것입니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명령과 약석의 형식으로 표현된 말로서 예수의 명령에 따르면 제자들은 고기를 잡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일종의 기적사호ㅘ 묘사다. 부활한 예수는 이제 기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 기적은 사랑받는 제자가 예수를 알아보게 하는 한 표징이다. 7절 “애제자”가 베드로보다 먼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았다는 데 역점이 있다. 문맥상 베드로와 “애제자”에 관한 보도와 관련되고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사실상 고기잡이의 기적사화는 11절에 더욱 매끄럽게 연결된다. 우선 베드로의 성급한 모습이 시사된다. 그물에 가득 담긴 고기들은 생각지도 않고 즉각 반응을 보인 베드로의 모습은 그가 예수를 부인하던 장면을 상기시킨다. “알몸”이었던 베드로가 “겉옷”을 즉시 걸쳤다는 말은 죄를 범한 후 알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던 의미로 의해할 수 있다. 베드로의 이런 반응은 참회를 우의적으로 뜻한다. 베드로가 호수로 뛰어든 것은 부활한 예수에게 제일 먼저 이르게 되는 베드로의 우선권을 시사한다. 문맥상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목권을 부여하는 장면과 관련된다. 8절 원문에는 200페퀴스. 한 페퀴는 45.8센티미터 또는 52.5센티미터에 해당한다. 9절 부활한 예수가 발현하여 제자들을 위해 마련한 식사의 기적을 시사한다. 10절 예수의 주도적 모습을 시사하는 말로서 고기잡이의 기적과 제자들을 식사로 초대한 발현사화를 연결하고자 하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 11절 베드로에게 부여된 사목권을 시사하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백쉰세”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상징적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분명한 것은 큰 물고기들이 그물에 가득 찼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내용과 함께 이 숫자는 기적사화 안에 보도되어 고기잡이 기적의 놀랍고 위대함을 시사해 준다는 점이다. 교부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시도된 가설돌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 종류의 숫자로서 충만함을 뜻한다. 1부터 17까지의 수를 모두 합한 것으로 충만함을 뜻한다. 153은 3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 100은 이방인 전체를 50은 이스라엘 남은 자를 3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153이란 정혹한 숫자는 목격자의 증언임을 시사한다. 아무튼 “큰 물고기들”이 그물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는 말과 함께 이 숫자는 충만성과 보편성을 사리키는 상징적 의미로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 “물고기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인 사도들의 인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 민족의 모든 신앙인들의 인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 민족의 모든 신앙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부활한 예수의 “어린양들”이 언급된 대목과도 맥락이 같다. “그물”은 예수 활동의 결실인 보편교회를 상징한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보편교회의 일치를 뜻한다. 예수는 이 일치를 위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기도드렸다(17,1-26). 12절 발현사화의 절정으로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가 마련한 아침식사에 초대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실상 고기잡이 기적사화는 11절로서 끝난다.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의 부활발현과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을 시사한다. 13절 부활한 예수는 식사 초대의 주인으로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또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계시한다. 즉, 제자들을 새로운 식사 공동체로 형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성찬례 공동체와 직결된다기보다 지상 예수와의 공동체가 부활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지속됨을 뜻한다. 고기잡이 기적과 연결된 이 보도에서는 부활한 예수의 행동, 특히 “주셨다”는 데 강조점이 있다. 부활한 예수의 이 행동은 자신의 풍요로운 사랑과 권한에서 연유된다. 부활한 예수가 지상 삶에 필요한 “빵과 생선”을 베불리 먹여 주었다는 점보다는 부활한 예수로 인해 형성된 공동체와 부활한 예수가 주는 신적 생명에 관한 관점이 지배적이다. 부활한 예수는 신앙공동체에게 언제나 새롭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그런 시각의 실존에 더 역점이 있다. 14절 예수의 부활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이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발현한 예수의 부활사화를 앞의 두 사화와 같은 맥락에서 보도하려는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