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부활 제2 주간 토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29 조회수2,209 추천수5 반대(0)

어릴 때입니다. 학교 화장실에 낙서를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옆을 보시오, 뒤를 보시오, 앞을 보시오, 일이나 보시오.’라는 낙서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화장실 낙서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빌딩의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은 죽었다. 니체그러자 그 아래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니체도 죽었다. 그리고 끝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니들 다 죽었어. 청소 아줌마청소 아줌마에게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나, 니체도 죽었다고 한 신이나 큰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청소해야 하는데 낙서를 해 놓으니 그것이 짜증이 났을 것입니다. 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을 교리로 고백합니다. 니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교회는 매년 삼위일체 중의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례를 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유교는 공자가 세웠습니다. ‘, , , , 이라는 덕목을 이야기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세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살아 있을 때의 일도 바쁘기 때문에 굳이 죽음 이후의 삶을 성찰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공자의 탄생일을 기념하기는 해도, 공자의 죽음을 매년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불교는 부처가 세웠습니다. 인생의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원수를 만나야 하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고 생각하는 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시 부처님의 탄생일을 기억하지만 부처님의 죽음을 따로 매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유독 교회는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매년 성대하게 기억하고,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는 파스카(부활)의 여정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와 같은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카펜터스도 ‘Yesterday once more'와 같은 노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모두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찬사와 사랑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선이라는 학생은 온 몸에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날 때부터 손가락이 3개 밖에 없던 현이라는 학생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불의의 사고까지도 감사하게 여겼고, 하느님께서 그런 자신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장애와, 고통은 그들에게는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가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방법은 3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평안하냐.’와 같은 말입니다. 막달레나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다정한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는 직접 만져보라고도 하셨습니다. 말씀만 하시는 예수님이 유령인줄 알았기 때문에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직접 만져보고서야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고기를 준비해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셨고, 그물에서 잡아 올린 고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함께 드시기도 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생명의 말씀, 기쁨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죽이는 말, 상처를 주는 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나눔, 기쁨과 평화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도 주님께서 못에 찔리셨던 발과 손을 보여 주셨듯이, 창에 찔리셨던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이, 우리들의 희생과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내미셨던 바로 그와 같은 손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의 소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면 형편이 좋아 집니다. 살을 빼서 건강해 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 지면 살이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