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7 부활 제3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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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06 | 조회수1,00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32 베드로는 모든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 34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36 야포에 타비타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38 리따는 야포에서 가까운 곳이므로, 40 베드로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주해 31절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지리적 순서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팔레스티나의 지리를 보면 유다가 제일 남부에 위치하고, 사마리아가 중앙에, 그 다음 갈릴래아가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목에서 루카는 유일하게 갈릴래아에도 교회가 건설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순서는 루카의 신학적 구도에 따른 순서다. 루카의 선교 구도는 먼저 유다인들이 사는 유다와 갈릴래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다음 유다인들의 이방인들 사이에 위치한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거쳐 이방인들의 영역에로 확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팔레스티나의 공동체가 누리는 평화는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기쁜 소식과 연결된 평화의 개념이다. 32절 루카는 베드로를 이미 여러 교회를 방문했고 지도하는 선교 책임을 맡은 중요한 인물로 그린다. 리따는 예루살렘과 요빠 사이에 있는 유다의 한 음으로서 지방관청이 있는 곳이었다. 35절 사론은 요빠와 가이사리아 사이의 해변 평야지대다. 리따라는 도시에서의 지엽적인 선교로 확대묘사된다. 루카가 애용하는 문학기법이다. 36절 그리스어로 도르가라고 번역되는 타비타는 아람어로 영양을 말한다. 여기서에서 영양은 “사랑스런 이”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선행은 자선을 포함한다. 자선은 유다교에서 매우 중시하는 덕이다. 38절 여기서 “그 무렵”이란 베드로가 리따를 방문하던 시기를 말한다. 시체를 씻기는 것은 장례식의 한 절차다. 다락방에 시채를 눕혔다는 보고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 이야기에서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락방에 올려 놓았다는 이야기를 반영한다. 38절 둘을 파견하는 초대 공동체의 관습에 대해서는 3.1;8.14;13.2를 보라. 39절 이 절의 표현은 베드로가 더 중대한 사건을 위해 고르넬리오에게서 파견된 사람들을 즉시 따라나선다는 10.23의 내용을 미리 준비한다. 40절 “일너나다”는 루카가 예수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동사다. 도르가의 부활 이야기는 예수께서 소녀를 살리신 복음서의 이야기와 유사점이 많다. 심부름꾼들의 파견, 주위 사람들의 애곡, 방안에서 외부인들을 내보냄. 일어나라는 명령. 손을 잡고 일으킴 등. 42절 애네아를 치유한 경우처럼 놀라운 사건을 목적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을 믿게 된다. 그들이 목격한 기적은 베드로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복음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해 60절 앞서 언급된 제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제자들로서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도 “유다인들”처럼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의 말과 함께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도 “유다인들”처럼 알아듣기 어럽다고 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61절 예수의 계시 말씀이 믿기 어려울 만큼 마음에 걸리는지 묻는다. 예수의 계시 말씀은 믿는 자에게는 오히려 믿음을 굳게 해주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큰 당혹에 빠지게 한다. 62절 문맥상 “하늘에서 내려오다”에 상응한다. “전에 있던 곳”은 곧 “하늘”을 가리킨다. 즉, “사람의 아들”의 고향은 “하늘”이고, “사람의 아들”은 그곳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것이 시사된다.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원문에는 없지만 문맥상 이런 질문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인격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하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믿는 사람은 예수의 말에 “걸려넘어지지”않는다. 예수의 참된 신원을 알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의 아들”이 들어높여져 영광스럽게 된다면 비로소 예수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더욱 견고케 되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더욱 불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63절 “영”은 생명을 줄 수 있으나 “육”은 그렇지 못함을 강조한다. 즉 “영”을 강조하기 위해 “육”이 상대적으로 언급된다. 한마디로 “육”은 생명을 주는 데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62절을 두고서 언급된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은 생명의 영과 약속된 생명의 선물 및 성체성사의 선물도 주는 권능을 가지게 되지만 “육”의 차원, 곧 지상적 지위에서 예쑤는 자신이 말한 그 모든 것을 다 이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이 소용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 자신의 “육”은 오히려 육화에서부터 십자가상 죽음의 헌신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상적인 영역과 천상적인 영역을 대조하기 위해 “육”과 “영”이 언급된 대목도 예수의 이런 지상적 지위와 천상적 지위를 비교하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이 대목은 예수 자신이 천상적 사람의 아들로서 생명을 준다는 데 역점을 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은 63ㄷ절에 직결된 말이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한 말들”은 제자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한 예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가리킨다. 즉 그 말씀은 오히려 “영이며 생명”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는 시몬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도 고백한다. 그러나 “영”과 “생명”이란 개념을 고려한다면 이 구절은 또한 63ㄱ절과도 내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은 영과 생명을 지닌 영적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육적 말씀, 곧 인간적 말씀오로만 받아들이고 육적 말씀, 곧 인간적 말씀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믿음으로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임은 예수의 약속을 전제한다. 아버지로부터 연유된 예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고 영원한 생명을 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믿는 이들이 예수의 말씀안에 머물고 그 말씀을 보존하여 그 말씀의 진리로 더욱더 깊게 인도되어야 한다. 64절 영이며 생명인 예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제자들 곧 예수의 말씀에 걸려넘어진 제자들도 있다는 사실이 예수의 입으로 증언된다. 문맥상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재차 촉구한다. 이 촉구에도 불구하고 계속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불신 때문이며 예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맥상 제자들이 예수를 배신하고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리라는 말도 관련된다. 65절 64ㄱ절에 연결된다. 인용된 예수의 계시 말씀은 내용상 44절과 가장 가깝다. 하느님의 은총으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어 있다. 66절 “이 때문에”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번역은 66절을 65절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다. 예수가 예시한 말이 이제 실제로 이루어진다. 이 사건은 예수가 열두 제자의 믿음에 대해서는 질문하는 계기가 된다. 예수 곁을 떠난 다른 제자들은 어둠 속을 거니는 자들로서 이제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때부터”라 번역도 가능하다. 67절 제자들이 예수 곁을 떠나간 상황에서 특히 열두 제자에게만 제기된 물음이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진지한 물음으로서 함구한 믿음의 격려도 내포되어 있다. 68절 베드로가 열두 제자 대표자로 시사되는 대목은 요한복음에 더러 있다. 예수만이 열두 제자에게 삶의 질과 영향을 제시한다는 뜻으로서 예수를 “하느님의 거룩한 분”으로 믿는 고백과 연결되어 있다. 63ㄴ 절의 내용을 이제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열두 제자는 예수의 말씀이 어려워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한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예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있는 영역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믿음의 자세다. 69절 예수에 대한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적 칭호는 공관복음에서도 저자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르다. “그리스도”,“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하느님의 그리스도” 그러나 예수의 메시아성을 말하는 데는 일치한다. 예수의 메시아적 칭호는 각 복음서의 깊은 신학적 이해 가운데서 사용된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도 예수의 메시아성을 가리키는 칭호로서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백약식은 우선 예수의 자기계시 양식, 곧 구약성서의 하느님 자기계시에 따른 예수의 신적 계시 “나요” 또는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에 상용한 것으로서 예수 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란 말은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서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의미는 10.36에서 더욱 명확하게 설명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파견하셨을 때 아들을 “거룩하게”하셨고, 파견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칭해진다. 그러므로 시몬 베드로의 이 메시아 고백은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서 신학적 해설이 가미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부 사본에서는 “하느님의 거룩한 분”대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되어 있다. “믿고 안다”란 이중적 표현은 신앙고백 내용이 일치됨을 강조한다. 특히 “안다”란 표현은 인격적 결속관계를 시사하고 믿음의 내적 확신을 강조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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