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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손절 대상 1순위는?
작성자김 글로리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07 조회수1,415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부활 제4주일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손절 대상 1순위는?>

 

 

 

 

복음: 요한 10,27-30

 

 

 



LORENZETTI, Pietro 작, (1325)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와 관계를 지속하고 또 누구와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손절했다가 결국 혼자 남겨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을 붙잡으려다 사람에 치여 고통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관계의 주체를 나로 두기 때문입니다. 

 

 

    ‘금쪽상담소’에 모니카 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니카 씨는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큽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책임져야 해서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더 깊어지는 사랑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모니카 씨가 태어날 때부터 아프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아프셔서 모니카 씨와 외식 한번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족을 부양해야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아버지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모니카 씨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책임을 분명히 져 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관계의 지속과 끊음에 관한 판단이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위해 ‘파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으신 분이십니다. 세례받은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습니다. 파견받은 사람은 파견하는 대상이 보내는 바로 그 대상에게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파견할 때 파견받는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대상에게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5,44-45)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관계에 대한 자세입니다. 파견받은 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파견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하시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셨기에 아버지의 힘이 나를 통해 그가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서 떠나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어질 때 나는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지 못하게 갖은 집착을 하다가 나만 피곤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모두를 책임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 큰 피해를 봅니다. 

    소위 ‘종교개혁자’라 불리는 ‘마르틴 루터’란 인물이 있습니다. 한때 벼락으로 친구는 죽었고 자신은 살았습니다. 그는 살려만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온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철저한 고행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때 바티칸 성당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교황과 교회가 소위 ‘면죄부’라는 것을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는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닌 연옥벌을 면하게 해 주는 ‘대사’였습니다. 죄와 벌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 떨게 했던 죄책감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차마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교회도 탐욕에 눈이 거의 멀었을 때였기에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을 근거로 반박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통해 주장을 펼쳤고 이것을 루터도 성경을 통해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이 됩니다. 만약 유대교와 개신교가 성경을 놓고 싸운다면 어떨까요?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두고 그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인지 아닌지, 개신교와 싸우면 어떨까요? 그 싸움도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데도, 교회가 루터의 생각에 말려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거부하는 루터에게 교회는 오히려 끌려다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루터는 그 논박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여 유럽에서 루터의 명성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교회가 세력이 너무 커진 루터를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루터가 하는 일을 그냥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싸움은 승리하였고 현재의 개신교가 탄생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오히려 관계에 대한 집착도 커집니다. 교회는 본인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되었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가차 없이 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대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상대해 주는 것 자체가 자신의 권위가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파견되었다면 굳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견하신 분은 파견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이에게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를 나간 이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신들을 몰라보는 이들에게 결국엔 무력을 쓰고 학살하고 강제로 믿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달루페 성모님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보며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력하지 않아도 수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자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때 무력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눈이 열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견받은 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다가가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그들에게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계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나를 그리스도의 파견자라 여기면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집니다. 우리는 어차피 승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파견받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 장군을 가장 싸움이 치열한 곳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다른 군인들은 뒤로 빠지라고 몰래 일렀습니다. 이는 우리야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승리할 수 없는 곳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신다면 더는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데 마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산적 떼에게로 파견하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파견받는 것이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우리가 파견받아 만나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것처럼 “네가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며 떠나보내면 됩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그 파견에는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질 곳에 파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마치 질 것처럼, 마치 관계를 잃을 것처럼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파견하시는 분은 파견받는 이와 하나이십니다. 그러니 관계의 맺고 끊음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알아보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되고 알아보지 못하면 떠나보내면 됩니다.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곳에만 파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분에게 파견받았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w06tYnorEEE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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