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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 부활 제4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09 조회수1,043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키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중요한 유다인 거류지로서 115

20~117년에 있었던 유다반란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다. 오순절 사건에 키레네 부근 리비아에서 온 유다인들도 참여한다(2.10).

 

21

주님의 손길은 칠십인역에서 하느님의 현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주님께로 돌아온다라는 표현은 루카가 좋아하는 어구.

 

23

루카는 은총을 하느님이 어떤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총애로 보았다. 안티오키아 공동체도 예루살렘 공동체처럼 주님께로부터 같은 메사아적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바르나바의 기뻐하는 반응은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업적을 증언하는 표시다. 바르나바의 격려는 그가 받은 사도직 직책에 속한다. 이런 윤리적 권고에 대하여 루카 3.18; 사도 2.40; 14.22; 15.32; 16.40; 20.1-2.

 

24

바르나바에 대한 묘사는 아리마태아 요셉에 관한 묘사와 비슷하다. 루카는 이런 덕성을 지닌 바르나바를 새로운 공동체의 합당한 창설자로 내세운다.

 

25

사울로가 헬라인들과의 충돌이 있은 뒤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그의 고향으로 보냈다. 사울로를 찾은 바르나바는 두 번째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다.

 

26

그리스도인은 크리스토스라는 칭호에서 비롯된다. 이 이름은 신도들이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외부인들이 붙여준 것이다. 메시아 광신자라는 의미를 띤 이 이름은 신약성서에 두 번 더 나온다.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22

성전 봉헌절 때의 논쟁

이 논쟁사화는 목자와 양들 비유로 해서 앞의 대목과 밀접하게 연결된 듯하다. 그러나 내용상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에 관한 주제가 일관성있게 엮어진 그리스도론적 논쟁사화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하느님의 아들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면서 주제가 심화하고 고조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란 말이 나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란 말로 바뀌면서 주제가 심화하고 고조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란 말로 바뀌면서 서로 연결된다. 이에 상응하여 예수에 대한 유다인들의 폭력적 반응과 강압적 공격 시도는 한 주체의 단락이 끝나는 대목에서 보도된다. , 그리스도로서 예수와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이다. 사실상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라는 존칭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내용이다. 바로 그 내용이 예수의 논쟁을 통해서, 특히 인용된 성서 말씀과 증거로 제시된 예수의 일들에 의거하여 언급된다.

 

기원전 165년 키스레브 25일에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더럽혀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정화하고 새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를 가리킨다. 이 축제도 초막절처럼 일주간 계속된다.

 

22

성전 동편 담에 위치한 주랑을 가리킨다. 솔로몬 왕이 지었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 예루살렘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에 자주 보이곤 했다. 이 주랑은 특히 겨울철 거센 동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유다인들의 폭력을 피해 떠난 성전에 예수가 다시 나타났다는 묘사는 차가운 분위기를 시사하는 겨울철이란 표현과 함께 논쟁상황을 암시한다.

 

23

예수의 적수들로서 예수를 불신하는 유다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24

불안과 초조 속에서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가 메시아인지를 묻는다.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군중의 여론이 이제 유다 지도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에게 직접 언급된다.

 

예수에게 명백한 자기해명을 요구한다. 메시아로서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이견제기다. 원문에는 크리스토스로 되어 있지만, 유다인들의 사고에 따른 메시아를 가리킨다. 믿지 않는 자들은 계시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때문에 예수의 자기계시가 드러나게 이루어졌어도 감추어진 셈이다. 따라서 유다 지도자들은 자기네가 확신하려 하지 않는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을 더 듣고자 하고 또 다른 표징들도 보려 한다.

 

25

유다인들의 불신이 지적된다. 불신이 예수의 자기계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가 유다인들에게 나는 메시아다라고 직접 말한 대목은 없다. 아마도 예수는 메시아에 대한 유다인들의 생각과 거리를 두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도 예수의 대답 가운데 메시아란 칭호는 없다. 유다인들의 생각과 달리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요 신적 구원진리의 계시자로서 이다.

 

예수가 행한 일들에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질문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아버지와 밀접한 친교를 나누고 아버지 자신은 예수의 일들 안에서 예수에 대해 증언하기 때문이다.

 

26

예수가 행한 계시나 일들을 듣고 보면서도 예수를 미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에게 속한 양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목소리를 듣지도 알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예수에게 속한 양들은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맡겨준 자들을 가리킨다.

 

28

믿지 않는 유다인들과 대조하여 예수께 대한 양들의 태도와 양들에 대한 예수의 배려가 앞서 언급된 목자와 양들 비유의 반복으로써 시각적으로 강조된다. 특히 구원의 보장은 다른 대목과 맥락을 같이한다.

 

29

어떤 사본에는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은 만유보다도 더 위대하고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상 문맥이 적절하지 못하다. 현 문맥에서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양들을 보호하는 예수의 힘은 곧 아버지의 힘이요, 아버지는 예수의 양들을 위협하는 만유보다도 위대하시다는 뜻이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 양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확실성을 아버지에게 둔다.

 

30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가 하나다라는 말은 예수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일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일치하고 하느님의 뜻과 지시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내용을 총체적으로 함축한다. 예수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일치에서 이루어진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깊은 대민적 관계와 동시에 본질적 동등성을 뜻하는 그리스도론적 언급드로도 볼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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