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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 입문[2/2] / 위협받는 유다[1] / 유딧기[2]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09 조회수1,367 추천수2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 입문[2/2](유딧 1,1-16,25)

 

또한 이 책의 원저자는 틀림없이 자기보다 훨씬 이전의 이야기를 이용하면서, 종교와 율법과 성전과 관련해 위협받는 동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아무리 큰 위험에 빠져도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또 당신을 믿는 이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서 당신께 등을 돌리지 않는 한, 그들의 적들이 어떠한 일을 꾸미든지 그것을 좌절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실 여주인공 유딧은 유다인 여자를 뜻한다. 그래서 유딧은 박해자들에게 항거하라는 유다 민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딧기는 유다인들이 이교도 세계의 위협에 직면하던 시대에, 그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저술되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구약 전체에 공통된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그때는 나라의 존립만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경신례까지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당히 독창적인 관점들도 여럿 볼 수가 있다. 이 책에서는 사건들이 극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들이 쉽게 가려질 수가 있는데, 그것들을 다양한 각도로 부각시키는 것이 유딧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사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초월적인 분이시다. 그분 계획은 사람들과 관련해서 볼 때에 분명히 자비로 충만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그 깊이를 속속들이 헤아릴 길이 없다. 이렇게 세속적으로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에게 끌어들이시는 시련의 기간과 범위도 확실히 예견할 수 없다. 사람들이 그분께 바치는 제물들은 그분의 위대함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다. 곧 이 이야기에는 어떠한 기적도 비상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반대쪽에서는 야심과 욕망으로, 유딧기에서는 인간적 정열과 신의의 결과로 펼쳐진다.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로서, 온 백성의 구원을 이룬 이는 한 여인이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유독 이 여인만은 당황하지를 않는다. 그녀는 단지 자기의 지혜로 배툴리아의 지도자들인 남자들의 용기를 감히 북돋운다. 그리고 어떠한 도움도 없이 혼자 대담한 일을 꾸며 실행에 옮긴다. 그렇게 무공을 이룬 후, 그녀는 아내와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다른 일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생활을 한다. 이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일종의 여성주의의 어느 한 극치의 단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유딧이 꾸민 그 계략은 그 자체가 어떤 덕의 표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옛 계약의 불완전성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어야 하는, 미진한 도덕적 행동도 아니다. 유딧 이야기의 많은 곳에서 드러나는 대로, 사람들의 꾀나 계략의 여러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유딧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평가가 나온다.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이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고 그 땅으로 홀로 쳐들어가, 민족의 생존과 종교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유딧은, 정당방위로 적군의 장수를 죽이는 것이다.

 

그녀는 적장을 유혹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자질이나 용모에 대해서 어떠한 자신이나 환상도 품지 않는다. 홀로페르네스 앞에서 신중하고 품위 있게 행동할 따름이다. 이교도 홀로페르네스가 강인하고 정결한 이 여인에게 빠져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정염 때문이다. 유딧은 하느님 도움을 확신하면서, 자신을 잘 다스리게 해 주는 기도와 고행 생활에 힘입어, 위험이 가득한 상황과 직면할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신심 깊은 이 과부의 단식은 어떠한 계명 준수가 아닌, 애도하고 참회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실 유딧기는 율법의 세부 사항들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무관심을 드러낸다. 이는 율법 준수라는 울타리로 선택된 백성을 보호하기보다는, 어쩌면 모든 이가 참되신 하느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려는 개방적 성향이 있음을 분명히 의도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바탕에는 율법에 관한 유연한 이해가 깔려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율법의 그 어떠한 부분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는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또 부차적인 사항들을 언제든지 새로운 상황에 적응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더구나 성경 저자는 유다의 위협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내리시는 시련이며, 또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유딧은 자기 민족이 과거처럼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기에 신뢰심을 잃지 않는다. 자기들이 포위되어 겪는 곤궁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하신 표징이 아니다. 오히려 백성의 구원과 거룩한 성읍의 보호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더 높은 덕을 실천하라는 그분의 부르심인 것이다. 유딧은 바로 이 몫을 선택한다. 고통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배려의 표시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딧기의 시작은 역사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출발하고 있다.[계속]

 

[참조] : 이어서 ‘3. 네부카드네자르의 공격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유딧,홀로페르네스,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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