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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
작성자김 글로리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19 조회수1,30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

 

 

 

복음: 요한 15,12-17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 당신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명으로 우리를 친구로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친구는 대등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등하게 여기시려 하는 것은, 물론 우리도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뜻도 있지만, 그래야만 당신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는 이유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 다시 아버지께 영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인간을 대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지위를 유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와를 생각해봅시다. 하와는 죄를 짓고 자기 본성을 타락시켰습니다. 이때 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아담도 자신처럼 낮은 본성으로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내밉니다. 아담은 그것을 받아먹고 같이 타락합니다. 하와는 여기에서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를 만들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온 세상에 인간이 나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라도 인간을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욕구는 ‘소속감’입니다. 하느님이나 죄인이나 다 옆에 있는 사람을 자기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부부도 결국 오래 살면 친구가 되어가지 않습니까? 어쩌면 모든 관계의 끝은 ‘친구’일 수 있습니다. 

 

 

    ‘캐스트 어웨이’(2000)에서 톰 행크스는 무인도에 표류합니다. 너무 외로워 배구공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그와 친구를 맺습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미친 짓이라도 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먼저 찾을까요, 아니면 엄마의 따듯함을 먼저 찾을까요? 해리 할로우의 실험에 의하면 새끼 원숭이조차 어미의 젖보다 따듯함을 먼저 찾습니다.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관계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조금씩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머무는 것은 내가 포기해야 할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다 하느님의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와가 아담도 자기와 같은 본성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뱀이 하와를 끌어 내리고 싶은 것도 당연합니다. 유혹자가 우리를 죄짓게 하고 싶은 것도 당연합니다. 다 자기 본성대로 친구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의 문제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와와 친구가 되면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휘둘리는 것입니다. 

    감옥에 갔던 어떤 조폭이 깊이 회개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극악무도한 조폭 두목이었는데 교도소에 갇히니 자신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발도 묶어 항상 허리를 굽히고 다니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꼭 이래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교도관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짐승이라 하늘 볼 자격이 없어!”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나는 아직 인간이다!’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이 말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꿈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에게 이 정도의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따라서 우리가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당신을 동등하게 여기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이 믿음이 성체성사를 통해 들어옵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나를 끌어내려 친구로 만들려는 낮은 본성의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 믿음 하나 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약해집니다. 이를 강화하기 위해 미사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면 강화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을 나의 본성으로 만들어 친구로 만들려 하지 않으면 이 믿음은 매우 약해집니다. 이웃을 끊임없이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기는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강화할 수 있을까요? 친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애플 TV의 ‘핀치’(2021)란 영화가 있습니다. 핀치와 제프라는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굿이어란 개 한 마리, 또 개처럼 생긴 로봇 듀이가 나옵니다. 태양의 플레어 폭발로 인해 지구 오존층이 파괴되어 사람들이 대부분 죽은 세상입니다. 핀치는 과학자였기에 연구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굿이어는 자신이 맡아 키우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식량을 구하려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여자아이의 가방에 들어있던 개입니다. 자신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굿이어를 위해서라면 핀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거대한 모래폭풍이 다가와 오랫동안 그곳을 뒤덮을 예정입니다. 곧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핀치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굿이어를 돌보아 줄 주인이 없습니다. 듀이는 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생명이 있는 개를 돌볼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엔지니어였던 핀치는 굿이어를 위해 인공로봇을 만듭니다. 

 

 

    이 넷은 먼 여행을 떠납니다. 로봇 제프는 사람처럼 생겼지만, 사람과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알지는 못합니다. 제프와 함께 이동할 때 로봇 개인 듀이가 죽었지만, 제프는 슬프지 않습니다. 핀치는 자기 몸이 죽어감을 알면서도 제프에게 굿이어를 맡길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그래서 ‘신뢰’란 단어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제프는 신뢰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핀치는 제프에게 신뢰란 단어를 자기 경험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가 직장에 들어왔을 때 가장 신뢰가 낮은 팀원들과 함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큰 건을 처리해 사장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때 핀치는 “제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한 것입니다”라고 공을 팀원들에게 돌렸습니다. 이것이 신뢰라고 알려줍니다. 제프도 조금씩 팀워크를 익혀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놀이를 하면 굿이어는 제프 대신 핀치에게 공을 가져옵니다. 아직 제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핀치는 숨을 거둡니다. 

 

 

    제프는 핀치가 자신에게 강아지를 맡겼음을 압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통조림을 따서 음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통조림통이 제프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통조림이 따집니다. 핀치는 제프의 가슴에 굿이어에게 음식을 주도록 장치를 미리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강아지에게 음식을 주자 강아지는 로봇을 따릅니다. 공을 던지면 자신에게 물어옵니다. 

 

 

    강아지는 본래 로봇에게 귀찮은 존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답하지 못하는 그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치 핀치가 살아나 자신을 안아주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얻습니다. 자기를 만든 창조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께 마치 제프에게 굿이어를 맡기듯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양식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보답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께 어떤 보답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아버지께 인정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내어줍시다. 그러라고 우리를 파견하였습니다. 보답은 마지막 우리가 생명까지 내어주었을 때 예수님께서 안아주심으로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보답받으려고 하다가는 인간에게도 하느님께도 보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이웃에게 무언가 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줄 수도 있고 성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주면 “당신도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고, 선악과를 내밀면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없어. 그저 인간일 뿐이야!”라는 믿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들려는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입니다. 남을 죄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하느님처럼 만들려고 해야 내가 하느님 자녀입니다. 누구나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이에게 성체를 주고 있나요, 아니면 선악과를 내밀고 있나요? 이것이 ‘나’입니다. 누구나 친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구란 ‘믿음’을 주는 대상입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믿음을 주고 있나요?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처럼 여겨주셨습니다. 내 안의 주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 해 보시고, 이웃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 해 보십시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제가 지금까지 찾아낸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의 신적 본성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친구를 만들면 하느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https://youtu.be/QEJcXOzkJU4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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