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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를 믿는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동의어
작성자김 글로리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1 조회수1,538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부활 제6주일 

 

 

 

 

<기도를 믿는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동의어>

 

 

 

 

복음: 요한 14,23ㄴ-29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그 지킬 힘이 되실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보다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고 남편에게 가서 돈을 받아서 자녀를 위해 먹고 살 걱정 없이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은 이 평화 속에서 어머니의 뜻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라는 큰 그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가 말씀과 성령을 주어야 할 자녀들을 위해 그것을 주실 분을 만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줄 모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더 위대해서 하느님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평소에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나를 그분이 좌지우지하시게 했다면 언제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아직 기도할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가 된 것이 하느님 탓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도 하지 않는 신앙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키웠다면 나는 그분께 무언가를 청해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 사랑도 믿지 않고 하느님 능력도 믿지 않고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음도 믿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믿으며 그분께 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이 시대는 모험의 시대로 수많은 이들이 바다와 북극과 남극, 혹은 높은 산을 정복하려던 영웅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서로를 위해 주고 각자의 일을 착실히 수행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해역에 서식하는 바다코끼리에서 따온 지명)에 도착한 처지에 그것은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우스조지아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 중 선원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섀클턴은 한 달 후에도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섬을 탈출하라고 명령합니다. 비틀거리는 배에 부딪힌 파도는 곧바로 얼어버렸고, 9일째가 되면서 커드 호의 움직임이 점점 위험스러워졌습니다. 나무와 돛, 줄이 꽁꽁 얼어붙은 채 간신히 물에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섀클턴은 고통스러웠던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원들 모두가 뼛속까지 젖고 얼었다. 7개월 동안 벗지 않은 젖은 옷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젖은 발과 다리는 하얗게 변한 채 심하게 부풀었고, 손은 때와 고래 기름, 동상, 스토브의 연기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손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전신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1916년 5월 (천신만고 끝에 조지아 섬에 도착한 직후) 섀클턴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와 다른 두 사람이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스트롬니스 포경기지까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천m, 험한 바위와 위험한 크레바스가 곳곳에 있고 대부분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몹시 위험했습니다. 아무도 넘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산이었고 당연히 지도도 없었습니다. 

    “섬의 지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우스조지아의 해안에서 안쪽으로 단 1km라도 들어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섀클턴)

 

 

    장장 36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산을 넘습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구조선을 얻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편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탐험의 성공보다도 더 큰 성공이었습니다. 인간성의 위대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섀클턴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분명 더 위대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섀클턴처럼 십자가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께서 주신 희망입니다.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믿음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국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https://youtu.be/n9CFJj868uo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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