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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음의 공포가 꼭 간직하고 살아야 할 은총인 이유
작성자김 글로리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5 조회수1,578 추천수3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부활 제6주간 목요

 

 

 

 

<죽음의 공포가 꼭 간직하고 살아야 할 은총인 이유>

 

 

 

 

복음: 요한 16,16-20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떠나심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서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을 받아 다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성령 강림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맞이할 준비가 바로 ‘근심’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9-20)

 

 

    세상이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부재(不在)를 근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이시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근심합니다. 이 근심이 있어야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어머니는 근심합니다. 이러한 근심이 없다면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아기를 낳는 기쁨을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근심은 피 흘리는 고통, 곧 죽음에 대한 근심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 불안 때문에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커지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이 불안을 없앱니다. 아니 없앴다고 착각합니다. 이때마다 주님은 다시 그 불안을 주시기 위해 그가 믿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광야’로 여기지만 사실은 주님을 찾게 만드는 축복입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은 세 명밖에 없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입니다. 

사울은 ‘교만’의 상징입니다. 그는 힘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노린다고 여겨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불안해하며 하느님께 자신이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힘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십니다. 

 

 

    다윗은 ‘육욕’ 때문에 큰 곤란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다른 남자의 아내를 탐한 그가 자기 아들에게 쫓기며 생명의 위협을 겪는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다윗이 뛰어난 왕인 것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죄 때문에 겪게 된 광야의 삶에서 하느님께 의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는 재물에 대한 욕심에 이방 신을 섬기는 여인들과 혼인하고 그도 이방신 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재물은 이렇게 그에게 또 다른 신이 되었고, 그 결과는 아들에게 온전한 나라를 물려주지 못하고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먹고살 것이 충분할 때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부러라도 근심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이 죄를 짓는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로 죽음의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이 불안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불안이 돈이 부족해서라 여기고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이기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부활하신 당신을 만남으로써만 해결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불안함이 당신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임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불안함을 주님만을 희망하게 하는 재료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탐욕-육욕-명예욕으로 이 불안을 잠재우려 하지 못하게 하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광야’의 불안에 속하게 해야 합니다. 광야는 당장 내일을 알 수가 없어 탐욕을 부릴 수도 없고 충분히 먹을 수도 없으며 성공하려는 욕망도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광야의 시기를 짧게 재연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이때 우리는 ‘단식’을 합니다. 단식하여 배가 고프면 죽을 수도 있다는 근심이 듭니다. 단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근심을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잎새』라는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화가 지망생 존시는 폐렴에 걸려 날로 병세가 악화하여 갑니다. 이 사람은 삶을 포기한 채 창밖에 있는 담쟁이넝쿨의 이파리만 세면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죽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화가 지망생이 사는 집 아래층에는 가난한 노인 화가 베어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노인은 세계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꿈이 있지만 현실은 그저 싸구려 광고물이나 그리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은 화가 지망생이 어느 날 창문을 바라보니 담쟁이 잎새가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밤새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보니 그 마지막 잎새가 담벼락에 그대로 붙어있습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자 존시는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두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잎새도 저렇게 버티는데 자신이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의사가 존시의 완쾌를 알려주던 날, 그 마지막 잎새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진짜가 아니라 아래층에 사는 노인 화가가 담장에 그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그린 그 노인은 그림을 마친 그날 밤 폐렴을 얻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죽음 앞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에 의지해서 내가 생명의 주체가 되려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시는 죽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쩌면 자신이 무시하던 술주정뱅이 할아버지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죽음 앞에 그렇게 머물지 못했다면 참 생명이 자기 집 아래 살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 생명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죽음 때문에 근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와 부활이 참 생명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차도록 매일 죽음에 대해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오시는 분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https://youtu.be/gKCzz2SKHbA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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