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7 부활 제6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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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26 | 조회수81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주해 9절 한밤중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현시는 바오로가 고린토에 1년 6개원 동안이나 머무른 이유를 실명한다. 이 현시가 없었다면 바오로는 계속하여 여러 지방을 바삐 돌아다녔을 것이다. 루카가 즐겨 등장시키는 현시에 대해 9.10; 10.3; 16.9 참조. 현시중에 나타는 주님은 9.5에서처럼 부활하신 예수로 이해해야 한다. “겁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10절의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과 더불어 예언자들에게 주시는 보증을 반영한다(이사 41.10; 43.5; 예레 1.8.19 참조). 12절 루카는 이런 식으로 구세사의 사건을 일반 세속의 역사와 일치시킨다. 델피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 보면 51년경에 아카이아 지방의 원로원 직속 총독으로 갈리오를 소개하고 있다. 갈리오는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이었는데, 세네카는 아카이아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 갈리오가 걸린 병에 대해서 언급했다. 글라우디오의 칙령와 함께 갈리오에 대한 사도행전의 언급은 바오로의 연대기를 정립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13절 바오로에 대한 유다인들의 고발은 16.20-21; 17.7의 고발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적 또는 정치적 위협이 아니라 유다인 종교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14절 바오로가 유다인들의 고발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러했으나 갈리오가 이를 막는다. 갈리오가 유다인들의 고발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발을 들으면서 그리스도교가 범죄나 폭동이나 그 외에 총독의 주관심사인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15절 유다인들이 제기한 문제는 설교에 관한 논쟁과 칭호와 유다교 율법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항들은 관례상 유다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에 갈리오는 도시의 안녕과 질서만을 관장하는 총독으로서 거기에 개입하기를 거절한다. 17절 바오로는 1고린 1.1에서 소스테네를 자기 서간의 공동 발신인으로 소개한다. 그러나 루카는 이 사람의 신분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또한 왜 회당장이 그리스도에서 갑자기 소스테네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을 모두 13.15에 언급된 회당장들의 집단에 소속된 인물들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다인들은 바오로에 대한 고발을 갈리오가 무협의로 처리하자 이에 대한 분풀이로 회당장들의 대표 한 사람을 붙들어 갈리오가 보는 앞에서 매질한다. 18절 겐크레아는 에게 해를 향해 고린토에서 동쪽으로 11키로미터 정도 떨어진 항구도시다. 로마 16.1에 따르면 그곳 교회의 부제 페베가 바오로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겐크레아에서 바오로가 머리를 자른 것은 그가 민수 6.1-21에 묘사된 자지르인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이 서약을 하는 유다인은 술과 같은 자극성 음료와 부정을 머리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을 특별한 형태로 봉헌한다. 자신이 서약을 하고 있는 중임을 드러내기 위해 이 시간 자신이 서약을 하고 남자든 여자든 머리를 깎지 않는다. 이 서약은 일생 내내 계속될 수도 있고 어떤 기간에만 지속될 수도 있는데, 서약 기간이 끝나게 되면 성전에서 머리카락을 면도로 민다. 그런데 미슈나에 보면 일평생 나지르 서약을 두 번 이상 하는 사람도 두 서약 사이에 머리를 깎은 것은 바로 미슈나의 규정 중 후자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곧, 새로운 서약을 또다시 시작하는 표시로 이발을 한 것이다(21.24 참조).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주해 20절 제자들과 “세상”을 이원론적 관점으로 언급한다. 제자들의 슬픔과 세상의 기쁨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한 것이다. 세상은 이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 기뻐할 것이고 제자들은 그런 세상에 남아 있게 되어 슬퍼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약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계기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를 다시 보는 데 있다. 예수의 이 말로 인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은 해소된다. 21절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리라는 약속(20절)을 좀더 밝히기 위한 일종의 비유다. 그러나 비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실제 변화에 역점이 있고, 그 변화는 예수의 부활로 이루어진다(22절 참조). 이와 흡사한 성서적 표상을 이사 26,17-18; 66.7-8; 미가 4.9-10; 마태 24.8; 마르 13.8에서도 볼 수 있다. 22절 산모처럼 제자들도 실제로 기쁨을 체험할 것인데, 그 기쁨이 “아무도 빼앗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항구적 기쁨으로 더욱 강조된다. 또한 “여러분이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16절)가 “내가 다시 여러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로 언급됨으로써 예수로 인해 상황이 바뛴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예수는 “부활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와서 “평화”와 함께 “기쁨”도 준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체험할 항구적 기쁨이 “여러분의 그 기쁨을 아무도 여러분에게서 빼앗지 못합니다”로 표현된 이 말은 우선 믿지 않는 “세상”이 가지는 기쁨과 대조를 이루고, 그 세상이 무력해졌음을 시사한다. 예수는 부활로 세상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고, 제자들은 부활로 예수의 자유, 평화. 기쁨을 누릴 것이다. 23절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과 성령강림을 가리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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