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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09 조회수1,100 추천수3 반대(0) 신고

 

오랜만에 복음을 묵상해봅니다. 신앙의 최종 종착역은 어디일까요? 하늘나라입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죄인이 갈 수 있는 곳인가요?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인가요? 오늘 복음 서두를 보면 하늘나라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는 표현에 결코라는 의미가 추가됐습니다. 왜 그냥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셔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듯한데도 굳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차용하시여 왜 그들의 의로움을 하늘나라 가는 조건에 대비시켜셨는지 한번 진지하게 묵상을 해봤으면 합니다. 이들은 평소 주님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역설의 미학이 숨어 있는 듯합니다. 마치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표현은 하시지 않으셨지만 실제로 의로움이라는 것은 그들이 항상 겉으로 드러내는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는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능가'와 '결코'라는 말씀에서 힌트가 있는 듯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율법에 정통하다고 한다고 해도 그들 수준의 범위 내에서는 어림도 없다는 말씀과도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이 생각하는 의로움은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게 의로움을 결정하는 척도라고 생각한 것일 겁니다. 마치 인간 세상에서 법은 잘 지키지만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비정한 냉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사람 속에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정의로움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소 법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최소한의 인간미가 살아 있다면 그 속에서 정의를 볼 수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마치 있는 그대로 동형 보복의 형태를 취하는 게 마치 정의의 실천이고 절대적인 계명인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비하하는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심지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어마무시한 말씀도 있는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인데 그건 예물을 바치러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형제의 사랑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배제된 상태에서의 예물은 예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과 같지 않을까요? 

 

아무리 율법에 있는 대로 그걸 잘 지킨 상태에서 하느님을 경배한들 경배하는 마음 속에 형제에 대한 분노와 같은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숭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는 것은 요원한 먼 나라의 꿈 같은 이야기일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의로움은 그저 단순히 겉으로 보여지는 의로움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에게서만 나오는 그런 의로움으로 무장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입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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