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산상수훈(17)
내가 음녀 이세벨이며 내가 음녀 바벨이다
(마태복음 5:27-32)
27 ''간음하지 말라' 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29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30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31 '또한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면 그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고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법을 주신 이유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구원(救援)과 유기(遺棄)를 결정짓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생명수를 마셔야만, 비로소 하늘 존재가 될 수 있는, 성도의 그 존재론의 회복(回復), 오해되어지고 곡해(曲解)되어져 있는, 성도의 그 존재론의 회복을, 위함이죠. 그러한 존재론의 회복이 바로, 생명차원으로의 몰입(沒入)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한 이 존재론의 그 터전이,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종교행위와, 선해 보이는 행사들은, 전부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무가치(無價値)한 것이며, 무의미(無意味)한 일이, 되는 거예요.
참된 생명에 대해서, 죽어 있는 자! 즉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의 그 진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자를, 죄인(罪人)이라고 하는 거고, 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모양의 사유(思惟)와 행위도 다, 죄(罪)라고 했죠.
성경은 그렇게 과녁을 벗어나서, (하마르티아)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자들을 ‘실족한 자’라 부르면서, 주님의 은혜(恩惠)에서, 끊어진 자라고도 불러요.
그렇게 한 몸으로 연합(聯合)되어 있어야 하는, 그 나무와 가지의, 그래야 열매가 맺는다고 그랬죠? 열매는 뭐? 12가지 과일(實果), 생명(生命)이란 말이에요. 그래야 생명이 맺혀지는데, 이게 끊어지면, 열매를 못 맺게 되는 거죠? 이걸 이혼(離婚)이라고 그러고. 이걸 간음(姦淫)이라고 한다고 그랬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렇게 이혼되어지고, 간음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偶像)의 독립을 위해 달리는 자들, 이렇게 죄라는 건,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 안에, 내재(內在)되고 잠재되어져 있는, 본질적이며 근원적인 개념인 거예요. 그래서 행위화 되어 나오지 않은, 그 마음속의 탐심(貪心)까지도 ‘죄’라고 한 거란 말입니다.
아직 제품으로 안 나왔는데 ,그걸 죄(罪)라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눈을 하나 뽑는다거나, 손목을 하나 잘라낸다고 해서, 그 존재의 죄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실제로 예전에 아주 철저한, 그러한 금욕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은요, 실제로 눈을 뽑고, 손을 자르고, 심지어 거세까지 한 사람도 있죠?
이 성경 말씀들을 그렇게 곡해(曲解)를 하면, 그렇게 큰일 나는 거예요. 엉뚱한 짓들을 버리는 거죠. 그런다고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 되냐고요? 이거 몇 개 자른다고 해서.... 하느님은 그 정도를, 지적하고 경고(警告)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 존재의 본질을, 지금 까발리고 계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른눈과 오른손을 뽑고 찍어라 라는 권고는, 단순히 우리의 죄 된 육의 절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악과라는 그런 인본의 에너지를 향한 인간 욕망(慾望)의 눈을 뽑고, 그들이 손을 뻗어 잡잖아요? 그 손을, 손모가지를 똑 잘라버리겠다는 그런 하느님의 선언(宣言)이요, 약속(約束)인 거예요. 그래야 살거든요.
그 탐욕의 눈과 탐심(貪心)의 손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무트 타무트, 정녕 죽으리라.’의 세계로 밀려들어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느님이 그거 잘라야 된단 말이에요. 그거 뽑아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결국 예수의 눈이 뽑혀지고, 구약에서 ‘누가 소경이냐? 내 아들이 소경 됐잖냐?’ 이렇게 하느님이 말씀하시잖아요. ‘내 종이 소경 아니냐~’ 이렇게. 예수님의 눈이 뽑혀진 거거든요. 그리고 예수님이 손이 십자가에 박혀 절단이 된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나오는 남과 여, 신랑과 신부 등의 구분은, 생물학적인 성의 구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영적 역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구분이란 말이에요.
아들을 가진 자, 그 씨를 가진 자, 말씀을 가진 자, 말씀을 씨라고 하고, 아들을 ‘제라’ 후손이라고도 하고, 그 씨라는 단어거든요. 같은 단어란 말이에요. 그 말씀, 아들, 씨를 가진 자를 가리켜 남자, 신랑, 아들, 이렇게 부르는 거고, 그 아들로부터 씨를, 생명을 받아야, 생명을 받아야 비로소 존재일 수 있는 그런 자들을 가리켜, 여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여자가 씨를 받으면, 씨를 가진 자, 말씀을 가진 자, 아들, 제라, 후손을 가진 자라 해서 아들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아들로 편입(編入)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것이 바로 천국 백성 탄생(誕生)의 메카니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씨를 가지기 위해선 ‘나는 여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선행 되어져야 되는 거죠?
그런데 여자는 뭐예요? 남자의 갈비뼈에서, 갈비뼈가 없으면, 남자의 죽음이, 잠듦이 없으면 존재일 수도 없는 자, 없었던 자, ‘나는 여자입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남자의 씨를 받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사랑도 없는 상태에서의, 그 여자들의 그 열심과 노력, 여자의 그 아들 흉내 내기. 그래서 ‘교회에서 여자야 잠잠 하라’ 그러는 거예요.
여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서 복음도 설명하고 기도도 하고 해야지, 왜 여자는 뭐 집에서 밥만 하고 설거지만 해요? 뭐 여자들은 교회에 와서, 그래서 보통 그 보수적인 개신교회에서는 여자들은 이 제대 위도 못 올라옵니다. 좋은 교회예요. 여기는.
그거 엉터리로 성경을 봐서 그래요. 표피적으로. 남자 여자를 그냥 생물학적인 그 어떤 그런 성의 구분으로만 보니까, 성경을 그 따위로 엉터리로 보는 거죠. 그래서 여자들이 그냥 교회에서 찍 소리도 못하고, 그렇게 다니는 거죠. 아녜요, 괜찮아요. 그렇다고 너무 떠들고 다니지는 마세요. 시끄러워 죽겠어요.
자, 그렇게 그러한 여자들의 ‘자기 의(義)’ 챙기기 있죠? 자기 스스로 독립성을 주장하면서 ‘씨 필요 없어~ 나도 하느님처럼 살 수 있어~’ 이걸 간음(姦淫)이라고 한다고 했어요. 자기 의.
그러니까 성경에서의 간음이나 이혼의 개념은,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그런 인간 본성의 한계와 내용, 실체, 그걸 지적하고 폭로(暴露)하는 개념이란 말이에요. 그게 이혼과 간음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혼하지 마!’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과 신부(新婦)가 하나로 연합된 상태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된 거예요. 이게 혼인(婚姻)이잖아요.
‘너 나 떠나게 되면 그게 간음하게 되는 거고 그게 죽는 거야~ 너 나 떠나지 마!’ 가 ‘이혼하지 마!’란 말이에요.
‘너희들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나에게 꼭 붙어 있어라. 내 갈비뼈가 없었으면, 너희들은 존재일 수도 없었어. 그런데 너희들이 무슨 독립을 주장하고, 그걸 추구하고 그래? 아니야, 이혼하지 마! 떨어져 나가면 죽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란 말이에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그 이혼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 주세요.
(요한복음 15:4-6) 4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 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런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이게 바로 간음하지 마. 이혼하지 마의 그 진의를 풀어서 설명해 주신 부분이란 말이에요.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의 상태가 간음이며 이혼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예수를 떠나 나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의지해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그들이, 버림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불속이라는 거예요. 불속. ‘게헨나’ 지옥이라는 거죠.
이러한 내용들은 간음이라는 단어의 그 어원적 본질을 살펴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간음이라는 단어 ‘모이코스’는요, 행동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불신앙, 불경건이라는 뜻이에요. 간음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면 성경이 말하는 간음의 의미가 좀 더 명확하게 이해가 되실 거예요.
(요한묵시록 2:20-23) 20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그 여자는 예언자로 자처하며 내 종들을 잘못 가르쳐서 미혹하게 했고 음란한 짓을 하게 했으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게 하였다. 21 나는 그 여자에게 뉘우칠 시간을 주었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뉘우치려고 하지 않는다. 22 이제 나는 그 여자를 고통의 침상에 던지겠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도 뉘우치지 않고 그와 같은 음란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버리겠다. 23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러면 모든 교회는 내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각각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간음이라는 게 ‘자기의 행위로 하늘에 올라 보겠다.’라는 게 간음이지요. 존재가 피조물이 하느님의 은혜 없이, 자기의 독자적인 나를 구축(構築)하려고 하는 게 간음이니까.
고게 이세벨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음녀 이세벨이 행음케 하는 거잖아요? ‘그래 해봐라 그러면 내가 네 행위대로 갚아 주마.’ 그런데 하느님의 기준은 우리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에요. 죽여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행위대로 갚아 준다는 건 행위대로 이렇게 계산해서 상주고 벌주고 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백 개 지키다가 하나 어기면 빵점이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무슨 테트리스도 아니고 올라가면 또 무너지고, 죽기 전에, 진짜 백년을 진짜 완벽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너무너무 죽기 전에 너무 아파서, ‘하느님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 잠깐 원망이 들었는데, ‘아니지’ 그러면서 막 쥐어뜯었는데, 하느님이 ‘빵점!’ 그러면 어떡할 거예요?
인간은 그런 거예요. 여러분 하느님의 기준이 거기라니까요.
그 동안에 그래도 백년쯤 한 거, 이거는 쌓아서 하느님이 상줄 근거로 스펙으로 쌓아 두셨겠지~. 천만의 말씀. 그거 다 빵점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뭘 쌓는다는 말이에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절대로 하느님 앞에서, 내 것을 쌓아서 내놓을 게 없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우상의 제물! 성전에서 드려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 불경건과 불신앙으로 더럽게 만드는 거. 우상의 제물을 먹인다는 거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 예수를 먹여야 되는데, 엉뚱한 걸 먹여가지고 힘만 좋게 만들어서, 인간들이 하는 행위만 쌓아 놓는 거.
그러니까 우상의 제물, 음행은, 성전! 교회에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에서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독자는, 오로지 성도라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성전이죠. 교회잖아요?
그래서 바오로가 뭐 여기저기 있는 교회들에게, 뭐 아무개 교회 아무개 교회 아니라, 우리 각자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 음녀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를, 하느님이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은유적으로 설명을 하시면서, 풀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안에서 일어난 일로 봐야지, 밖에서 음녀를 찾으려고 하면 안 돼요. 이게 다 내 안에 있는 일이란 말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나를 보아야 되는 거지, 말씀을 통해서, 너의, 나 이외의 그, 너의 행태를 지적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나’가 바라보는 ‘그, 너’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그러한 권한(權限)이 없어요. 피조물이 누가 누구를 판단(判斷)합니까? 누가 자비의 대상이고 누가 유기(遺棄)의 대상인지는 하느님만 알아요.
‘나’라는 존재를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강력한 스승이, 어디서 그 가르침이 가장 많이 들리고, 강력하게 들려요? 내 안에서요. 인간은 어떤 정보나, 외부에서 어떤 지식을 습득하면, 곧 ‘나’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내 색깔로 입혀내는 게 인간이라고요.
그러니까 가장 강력한 스승은 ‘나’라니까요. 그 이세벨이 가르쳤다고 그러죠? 내가 나를 가르친다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래서 그 마음을 하느님이 바꿔주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음녀가 가르치는 대로,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자, 그렇게 내 안의 음녀 이세벨이 있는 거고, 내 안에 간음하는 여자가 있는 거지, 나는 괜찮은데, 내 밖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내가 음녀화 되는 게 아니에요. 친구 잘못 만나서, 음녀 되는 거 아니고, 내가 음녀(淫女)라고요.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괜찮은 나를 추구하는 걸, 성경이 ‘세상과 벗한다.’라고 해요. 세상과 벗한다는 건, 단순히 뭐 세상에 있는 쾌락이나 돈이나 힘,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그것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에요.
세상 속에서 나를 구축하는 걸, 세상과 관계있게 사는, 세상과의 벗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느님과 벗으로 살아야하는, 아브라함 보고 벗이다. 그랬잖아요? 내 벗! 내 친구!
그런데 그 하느님과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 그 하느님의 벗이, 세상 안에서 세상과 관계 맺으면서, 자꾸 그 세상의 벗이 되려고 하는 거, 이걸 ‘우상 섬김’이라고 그러고, 이걸 간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성경이.
(야고보서 4:4)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느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
이 간음하는 여자들은 유곽(遊廓.창녀촌)에 있는 어떤 그런 분들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간음하는 여자들아~, 이렇게 부르는 건.
그렇다면 왜 성경이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음녀의 이름을 굳이, 이세벨이라고 명명을 하는지, 잘 보잔 말이에요.
이세벨 왕비는 아합 왕에게 시집오면서, 자기가 섬기던 우상들을 왕창 갖고 왔어요. 그게 바알과 아세라예요. 풍요와 다산의 신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섬기게 만든 여자예요.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여자예요. 간음을 하게 한 여자죠
하느님과 신랑, 신부로 살아야하는 이스라엘에 와서, 다른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을 소개시켜 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이스라엘을 간음케 한 여자고, 그 여자가 자체가 간음한 여자란 말이에요.
이렇게 하느님이 아닌, 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걸, 음행케 한다, 간음케 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단순히 ‘세상의 힘을 얻으세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세요.’ 이런 뭐 고지론이나 기복사상, 이런 유치한 거 말고, 그건 물론 간음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말고 ‘사람다운 사람이 되세요. 신앙인으로서 이 따위로 살아서 되겠습니까?’ 예수와 십자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냥 그들의 행위만을 독려하여, 도덕과 윤리로 계속 끝내는 거. 너를 빛내라는 거예요. 그게. 그건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에 영향력을 미쳐라. 이거 보다 더 무서운 거예요. 그거는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의 은혜 안에서 그렇게 사시라는 거죠.
그러한 음녀 이세벨을 향한 하느님의 저주(詛呪)가 이러해요.
(열왕기하 9:36-37) 36 그들이 돌아 와 예후에게 보고하니 그는 '야훼께서 당신의 종 디스베 사람 엘리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구나.'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즈르엘의 밭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시체를 먹을 것이라고 하시더니, 37 이세벨의 시체가 이즈르엘의 밭에 똥같이 굴러 다녀 아무도 그것이 이세벨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리라고 하시더니, 기어이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음녀(淫女) 이세벨의 고기를 개들이 뜯어먹도록 저주하죠. 요한묵시록에 가면, 어떤 여자를 짐승들이 뜯어먹는 장면이 나와요.
(요한묵시록 17:16) 그리고 네가 본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탕녀를 미워하여 벌거벗기고 처참한 지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리고는 그 탕녀의 살을 뜯어 먹고 마침내 그 탕녀를 불살라 버릴 것이다.
열왕기서에서 언급된, 그 이세벨이 요한묵시록에 이렇게 등장해요. 이렇게 음녀 이세벨은, 간음하는 여자는 반드시 죽어야 돼요. 철저한 멸망이에요. 그런데 이게 음녀 이세벨이 요한묵시록에 어떻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보죠.
(요한묵시록 17:1-5) 1 대접을 하나씩 가진 그 일곱 천사 중의 하나가 나에게 와서 '이리 오너라. 많은 물 위에 앉은 엄청난 탕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 2 세상의 왕들이 그 여자와 더불어 놀아났고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여자의 음란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 하고 말했습니다. 3 그리고 그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감동시켜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히 적혀 있었고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4 이 여자는 주홍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하고 있었으며 자기 음행에서 비롯된 흉측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히 담긴 금잔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5 그리고 그 이마에는 '온 땅의 탕녀들과 흉측한 물건들의 어미인 대바빌론' 이라는 이름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요한을 데리고 광야(廣野)로 가죠. 성령이 어떤 인물을 광야로 데리고 간적 있었어요. 지금 그 이야기를 연계(連繫)시켜서 지금 설명을 하고 있어요. 이 광야는, 이미 묵시록 12장에 한번 등장했던 곳이에요.
(요한묵시록 12:1-6) 1 그리고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 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2 그 여자는 뱃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있었습니다. 4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 갔고 6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느님께서 천 이백육십(1,260)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천 이백 육십일(1,260일), 삼년 반,(3.5ⅹ12ⅹ30) 마흔 두 달,(42ⅹ30) 똑같은 거죠? 다. 이 역사, 인생을 이제 상징으로 가리키는 숫자란 말이에요.
이 열둘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 아들 안에서, 아들로 입양된, 편입된, 그러한 하느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1장 1절에서 ‘교회를 흩어진, 열 두 지파에게 편지합니다.’ 교회에게’를, 열 두 지파라고 이야기해요.
요한묵시록에서도 계속해서 열 두 지파, 열 두 사도, 이것이 열두 문 위에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죠? 교회란 말이에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우리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열둘, 이 열두 별, 면류관을 쓴 이 여자는 교회란 말이에요. 그 교회가 도저히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존재요. 원래가 없음이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와, ‘무트 타무트’ 죽은 여자니까 잉태 못합니다. 원래 못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제는. 선악과 먹고는. 하와, 사라, 또 라헬, 리브가, 마리아 전부 애 못 낳는 여자들이죠? 그런데 이 라인에서 예수님이 와요. 그리고 왜 맨 마지막이 마리아냐면, 그 마리아가 ‘쓴물’이라는 뜻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쓴물이 단물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나뭇가지가 던져져야 되는데, 그 십자가에 의해 마리아가 단물이 되어, 생명수, 그 생명수를 부여받고, 잉태를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나오는 거거든요. 그러니 이 여자가, 도저히 불가능한 여자가, 그 어떤 그 마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인의 후손, 아들, 제라,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를 낳고 광야(廣野)로 가요. 그 광야는 ‘광야 교회’라고 그러잖아요? 교회생활, 여기가 뭐예요? 양육 받는 곳이에요. 그런데 양육이라는 그 단어 ‘에추레포’라는 단어가 무슨 말이냐 하면, ‘장성한(자라서 어른이 됨) 분량까지 자라게 하다.’라는 뜻이에요. 이게 ‘양육하다’거든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이 교회라는 뜻이에요. 우리 인생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러면 또, 속으로 ‘거봐 자라야지 뭐’ 이렇게 말씀할 거라고요.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의 의해 바로 그 광야에서 무엇을 행해 놓으셨는지, 완료(完了)해 놓으셨는지를 알아야 그 분량까지 자랄 거 아니에요? 그 광야에서 예수님이 어떤 걸 이루셨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거기까지 자라야 되는 게, 교회 안에서의 성도, 여자들의 일이란 말이에요.
광야에 가서 예수님이 시험(試驗)받았어요. ‘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예수님은 산돌이라고 그래요. 모퉁이 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분이 원수들의 만나, 빵이 되어서 이 땅에 온 걸, 십자가라고 그러죠. 그러면 마귀가 ‘돌로 빵을 만들어라’라는 건, 정확하게 복음,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 먹고 힘내서, 말씀이, 복음이 나에게 힘이 되어서, 너의 생명을, 역사 속 생명을 유지하게 하라.’ 이게 교묘(巧妙)한 거예요.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은혜 이야기 다 하는데, 그걸 인간의 자존심 혹은 그 존재의 자랑이나 설명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는 요게, 마귀의 속삭임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아니야. 나 돌로 빵 만들어 먹고 그걸로 내 생명 유지할 거 아니야~ 나는 떡 돼서 죽을래.’ 그래서 빵이 돼서 죽으셨어요. 십자가에서.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러면 천사들이 수종들 거 아니야~’ 이것도 역시 성경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성전에서, 묵시 속 성전에서, 역사 속으로 뛰어내린 분이죠. 그걸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그래요. 성육신.
그러면 하느님이 역사 속으로 뛰어내리셨으면, 천사들이 수종들면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란다. 이렇게 설명을 해줘야 되는데 수종을 든 게 아니라, 손을 쏙 빼버렸어요. 뚝 떨어져 죽었네요. 십자가예요.
하느님의 아들이 성전에서 뛰어내렸는데 아무도 그분을 수종들어 주지 않았어요. 다 그분을 버리고, 죽게 놔뒀단 말입니다. ‘야, 하느님 시험하지 마!’ 그랬어요. 예수님이. ‘나 그냥 죽을 거야. 내가 성전에서 뛰어 내린 건, 죽기 위해 온 거야.’ 두 번째예요.
세 번째는, 나에게 경배해 ‘프로스큐네오.’ ‘예배’라는 뜻이에요. ‘연합’이란 뜻이에요. ‘뭘, 뭘 향하여 입 맞추다.’ 연합인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뱀이 되어 죽으셨죠? 놋 뱀이 되어서 죽으셨어요. 뱀과 예수님이 연합(聯合)된 거예요.
예수님이 죄인이 되셔서 죽으신 거예요. ‘그래 그러면 세상 이 부귀영화, 만국, 천하만국을 줄게.’ ‘아니야~, 나 이 천하만국 내 백성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거 아니야. 나 하느님 나라 완성하러 왔어!’ 그리고는 ‘주 너의 하느님만 경배해야지~. 왜 내가 너에게 경배해?’
세 개가 다 뭐예요? 성경은 우리 이 피조물들의 처음자리를 낱낱이 폭로하고, 하느님의 그 창조주 되심을 설명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거기서 찬송이 터지게 하는 게, 성경인데, 마귀는 항상 이 음녀들은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그래 그게 복음이잖아.
그러니까 그걸 갖고, 너희들을 열심히 치장하고 성숙시키고 변화시켜서, 다른 이들이 너희들을 존경하게 해! 너희들을 롤 모델 삼게 해!’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게 잘 가르치는 거 아닌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기 관음사나 이런 데로 가세요. 그건 그리스도교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나를 자랑하고 증명하는데, 하느님마저도 끌어당겨 사용하려고 하는 이게, 행음이며, 간음이며, 세상과 벗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하느님이라는 신랑과 이혼한 자들의 그런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는 반드시 광야에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받은 자로서, 아들을 가슴에 품은 자로서,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십자가 지고 부인당하여 죽는 그 자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는 거예요, 거기가.
그게 예수님이 광야에서 성취한 거니까. 착해지는 것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는 거, 바꿔 말하면 십자가 뒤로 점점 작아지고, 이렇게 숨어 들어가는 그걸, 양육(養育)이라고 그래요. 제자 훈련해서, 뭐 저기 어디 그냥 군사가 되어서, 다른데 가서, 순교하고 죽는 이런 용사들을 만들어내는 게 양육이 아니에요.
광야에서 양육을 받게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렇게 수렴되어 들어가게 돼요. 몰입(沒入)되어 들어가게 된다니까요. 그게 여자가, 광야에서 하는 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자는 반드시 광야에서, 아들이 받으신 시험을 받도록 되어 있어요. 그 양육의 과정에 동원 되는 게, 여전히 그 여자 안에 남아 있는 마귀적 속성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구원받고 바로 성자가 되지 않는 이유가 그거예요.
그 안에 있는 그 마귀성으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점점 잃어가는 거예요. 이게 양육이라니까요. 그래서 여자 안에서는 늘 시험, 즉 전쟁(戰爭)이 끊이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그 여자가 광야로 가서 양육을 받는데, 광야에 가봤더니, 성령에 끌려 광야 가봤더니, 그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어요. 그런데 결국 그 여자가 짐승에게 벌거벗겨져서 맞아 죽어요. 예수의 모습이에요. 조금 아까 봤잖아요. 벌거벗겨서 물어뜯어서 먹어버린다니까요. 짐승이.
그렇게 광야에서 짐승을 타고 있는 그 여자는, 나의 밖에서 존재하는, 절대 타자로서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서 여전히 나를 가르치고 훈계하고 이끌어가려고 하는, 마귀적 속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묵시록 12장에, 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 여자가 도망간 광야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13장에 그 유명한 666, 짐승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여자가 이 짐승을 타고 앉아서, 짐승이 뭐였어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 맨 위의 용(龍). 용이 권세와 능력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주죠? 이 세상의 권세(權勢), 이 인간들, 피조 세계의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그런데 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죽었다가 살아난 흉내를 낸단 말이에요. 성자 예수를 흉내 내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권세 이 땅의 권세와 가치를 추구하는 가짜,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요게 맞아~’라고 하면서, 기적과 이적을 동원하여,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하게 하죠? ‘이게 맞는 거야~ 맞는 거야~’ 분위기 잡는 거예요.
성령집회다 뭐다 하면서, 기적과 이적을 막 행하면서, 은 이빨, 금이빨로 막 바꿔주면서, ‘이게 맞는 거야~’ 어떤 사람은 그거 다 바꿔주면 어떡할까요? 그거? ‘이빨이 전부 누렇게 금으로 바뀌면 어떡할까?
아 그거 걱정 되서도 못가겠는데, 나는 거기에.’ 오늘날 교회가 이 흉내를 그대로 내는 거죠? 그 모습이에요. 이게. 삼위일체 하느님을 그대로 흉내를 내는데, 하느님의 자리에는 못 올라가요.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수, 안식의 수, 7과 완전 수, 하느님의 수, 삼위의 하느님, 3. 그래서 777을 하느님으로 표기했단 말이에요. 거기에 못 미치는, 흉내만 내는 자 666이에요. 그게 마귀의 세력이란 말이에요.
무슨 베리칩(VeriChip)이니 이딴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좀. 그런 거 나오면 빨리 받으세요. 그냥, 편안하게. 그거 받아야 마귀가 날 조종해요? 천만예요.
지금 우리 마귀가 조종해요, 솔직히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더 많아요? 마귀에게 끌려가는 삶이 더 많아요? 그런데 무슨 베리칩 핑계를 대려고 그렇게…. 지금 마귀새끼처럼 살면서 다~.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은요. 그런 유치한 얘기하는 거.
그 짐승! 그걸 여자가 타고 있어요. 이 여자가 지금 추구하는 이 세속적, 이 세상적 욕망이 바로 그 짐승의 실체(實體)란 말이에요. 연합시켜버리는 거예요. 둘을. 그래서 앉혀버리는 거예요. 거기다가 그렇게 붙여버리는 거죠.
그리고는 결국 이 짐승을 시켜서, 얘를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아니지~? 그러니까 너는 신랑에게 붙어야지~ 왜 짐승에게 붙고 그래?’ 이게 역사란 말이에요. 성도가 경험해야 하는 역사.
자, 17장에 그 음녀 이세벨 간음케 하는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는데, 그 짐승이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갖고 있고, 모독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요. 그건 13장에 나오는 바다짐승과 똑같은 모습이죠? 그 짐승은요. 고걸 타고 있는 거예요.
(요한묵시록 13:1) 1 또 나는 짐승 하나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뿔이 열 개이고 머리는 일곱이었습니다. 그 뿔에는 각각 관이 하나씩 씌워져 있었으며 그 머리마다 하느님께 모독이 되는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똑같잖아요. 17장의 그 짐승,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과 13장의 바다에서 올라온 예수 흉내 내는 그 짐승과 똑같단 말이에요. 야훼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름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밑으로 내려가면, 그가 어린양과 싸우는 자, 그래요. 십자가를 대항하여 싸우는 거예요. ‘은혜는 무슨 은혜야? 우리도 해야지’ 이거! 어린양과 싸우는 자, 그게 짐승이란 말이에요. 그 열 뿔은, 피조물의 권세를 키우고 쌓아서,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그 마귀의 세력의 욕망의 강도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열 뿔이에요. 완전한 열 뿔! 일곱 머리는, 그 밑에 보면 일곱 산이라 그래요.
(요한묵시록 17:9) 9 이제는 지혜로운 이해력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언덕이며 또 일곱 왕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밑에 가면, 시방 감추어진 왕은, 이걸 이제 일곱 왕이라고 하거든요. 요 밑에서. 그런데 시방 감추어진 왕이 또 하나 있어요. 이 세상이에요. 우리와 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시방 감추어진 왕은, 일곱에 속한 여덟 번째 왕이라고 그래요. 그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우리! 그런데 교묘하게 숨어 있는, 감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가 곧 나타날 그거! 그거 우리예요. 교회를 이야기는 거요. 오늘날 왜곡(歪曲)되어진 교회,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절이나 사원 이런 거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성경은 그런데 관심이 없어요. 교회 안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요. 성경은.
자, 여기서 보면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언덕(산)이라고 그러죠? 그리고 그 아래 보면,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자는 지금 짐승 위에 앉아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또 산 위에 앉아 있다고 그러죠? 그러면 일곱 산, 일곱 짐승, 열 뿔, 뭐 일곱 왕, 이건,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자꾸 뭘 대입해 갖고, 뭐 EC공동체 뭐 이런 거,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 위에, 음녀인 여자가 타고 있다는 건, 바로 ‘그 짐승의 속성을 가진 자가, 음녀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연합된 형국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으로 가서, 그 음녀인 일곱 왕! 일곱 산! 일곱 머리! 그것의 정체가 뭔지 한번 보자는 말이에요.
(예레미야 51:25) 온 세상을 짓부수던 멧부리야, 이제 내가 너를 멸하리라. 나 야훼가 선언한다. 팔을 뻗어 너를 움켜잡고 바위 꼭대기에서 내려 굴리며 산에 불을 지르리라.
그 산이 온 세계를 죽음으로 멸망으로 몰고 간다고 그러죠? 아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죄의 세력, 그 뱀, ‘나하쉬,’ 뭔 말을 하기는 했는데, 나하쉬가 ‘말이 없음’이란 뜻이죠? 가짜 말을 하는 거. 뱀이란 말이에요, 이게. 멸망으로 몰고 가는 거. 가짜 말, 엉터리 말씀. 그게 음녀래요.
(에제키엘 35:3) `주 야훼가 말한다. 세일산에 사는 자들아, 나 이제 팔을 휘둘러 너희를 치고 세일을 황폐한 쑥밭으로 만들리라.
여기서 산은 하느님의 대적(對敵)입니다. 즈가랴서에 가면 조금 더 확실해져요.
(즈가랴 4:6-7) 6 그 천사가 나에게 일러 주었다. 이것은 야훼께서 즈루빠벨이 할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권세나 힘으로 될 일이 아니라 내 영을 받아야 될 일이다.' 만군의 야훼께서 하신 말씀시이다. 7 '산아, 네 아무리 크다 하여도 즈루빠벨 앞에서는 평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산에서 머릿돌을 떼어 올 때, 사람들은 '멋지다, 멋지다.' 하며 환성을 올리리라.'
야훼의 성전은, 피조세계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나의 영, 성령에 의해, 은혜로 지어지는 거야. 이걸 부정하는 걸, 큰 산이라고 하는 거예요. ‘큰 산아, 네가 은혜를 무시해!’ 이거예요. 큰 산, 그 짐승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짐승, 음녀, 열 뿔, 일곱 머리, 일곱 왕, 일곱 산 등은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서, 자신들의 힘과 능을 증명하려 하고 자랑하려 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모습이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성숙한 정도까지 자라나는, 하느님의 양육을 받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보이더라는 거예요. 그게 역사 속에서 시험받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에제키엘 23:1-4) 1 야훼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2 '너 사람아, 예전에 두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한 어미의 딸이었다. 3 그들은 에집트에 있을 적에 이미 놀아났었다. 소녀 적부터 놀아났었다. 거기에서 사내들에게 으스러지게 껴안겨 남자를 모르던 그 젖가슴이 짓눌렸었다. 4 언니의 이름은 오홀라요, 아우의 이름은 오홀리바였다. 그들은 내 사람이 되어 아들 딸을 낳았다. 오홀라라는 이름은 사마리아를 말하고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을 말한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남 유다. 이스라엘 전체. 뭐라고 그래요. 그걸? ‘간음하는 여자’라고 이야기해요. 하느님이요. 그들이 애굽에서도 간음했다라고 그래요. 에제키엘서 23장을 계속 읽어보시면요. 그들이 아시리아와 바벨론과 간음을 했다.
아시리아는 강대국,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어요. 바벨론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 강대국들을 흠모(欽慕)하며, 세상의 힘을 흠모하며 하느님보다 그들을 의지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하느님이 아닌 다른 강대국에 가서 원조를 청하면, 하느님 대노하시죠? 그때마다. 그걸 간음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하느님은. ‘나에게 찾아와야지 어떻게 세상에 있는 다른 것들을 찾아 가냐~?’ 그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애굽과도 간음 했다. 뭐예요? 애굽의 문명과 힘을 좋아했다는 거예요. 종살이만 잘 해주면 내가 먹고 싶은 거, 부추와 마늘과 고기, 이걸 얼마든지 주는, 내가 원하는 걸 주는, 그곳을 좋아한 거예요. 그걸 얻기 위해서는, 난 종살이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걸 거짓 경배, 거짓 섬김, 거짓 예배라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 내가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먹고 싶은 걸 얻어내기 위해서는, 갖고 싶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경배하는 척, 섬기는 척, 찬송하는 척, 기도하는 척, 헌금하는 척하는 거. 이걸 간음이라고 그래요.
뒤에 두루치기 집에 가면,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항상 줘서, 그 때마다 이 대목을 생각나게 되는데, 조금 아까 그거 먹으면서, ‘아이 부추와 마늘 너무 맛있어~’ 아 그걸 종살이하는 시늉만 하면 준다니까요. 그냥. 거기를 흠모한 거예요. 그래서 광야에서 걸핏하면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이 만나 웬 말이냐~ 돌아가자!’
성경은 이렇게 그 짐승을, 바벨론이라고 했다가, 묵시록에서는 그 음녀를, 바벨론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그 짐승과 음녀의 속성은 정확히 일치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짐승은, 여자의 양육도구로 사용되어진 후에, 용도 폐기 되어도 되는데, 여자는 양육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성숙한 단계까지 자라서 살아야 돼요.
그래서 죽어도 못 죽어요. 하느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그 여자,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를 어떻게 살려내는지 아세요? 짐승을 시켜서, 이 여자를 죽이는 방식으로 살려내요. 보세요.
(에제키엘 23:22-27) 22 오홀리바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네가 정을 뗀 너의 정부들을 부추겨 너에게 달려들게 하리라. 사방에서 데려다가 너에게 달려들게 하리라. 23 바빌론 시민뿐 아니라 브콧, 소아, 코아 등 온 바빌론 백성과 온 아시리아인들을 데려 올 터인데 그들은 모두 말탄 멋진 젊은이들, 총독이 아니면 지방영주들, 장군이 아니면 부관들이다. 24 그들은 북쪽에서 병거와 수레를 몰며 대군을 거느리고 너에게 쳐들어 올 것이다. 크고 작은 방패를 들고 투구를 쓰고 사방에서 쳐들어 올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재판권을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법을 따라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25 나는 너를 괘씸하게 여겨 그들을 불러들이리라. 그들은 네 코와 귀를 베며 화풀이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서 태어난 것들을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네 아들 딸들을 더러는 잡아 가게 하고 남은 것은 불에 태워 죽이게 하리라. 26 그들은 너에게서 옷을 벗기고 장신구들을 잡아 뗄 것이다. 27 나는 네가 다시는 음란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리라. 에집트에 있을 때부터 피우던 바람을 피우지 못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다시는 에집트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에집트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여자들을 살리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아시리아와 바벨론, 너희들이 타고 앉아있는 그 짐승을 시켜서, 너희들을 공격하게 함으로. 그래서 실제로 BC 721년에,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한테 망해요. BC 586년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해요. 성경은 정확해요.
그런데 그건 하느님이 간음하는 자기의 딸들을 살리기 위해, 행음하는 걸 그치게 하기 위해, 그들이 타고 앉아 있던 짐승을 오히려 동원하여, 여자를 쳐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네가 타고 앉아 있는 그것이, 너를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하느님이 새 생명으로 살려 주세요.
우리는 그것을 장악하고 정복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를 정복하여 죽인다니까요. 그때 ‘하느님, 신랑이여, 나 좀 도와주세요.’ 이리로 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흠모하던 가짜 신랑 아시리아와 바벨론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발가벗겨서 죽이게 하는 거예요.
마치 창녀 고멜이, 자신이 간음하던 남자들에게 단물 다 뺏기고, 노예시장으로 버려지는 그런 꼴인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때 신랑이 찾아가죠. 그 여자가 어디로 갑니까? 신랑에게 꼭 붙어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이 간음한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느님께서 들어서 쓰시는 아시리아와 바벨론은, 굉장히 매력적(魅力的)이에요. 이게 음녀 바벨론을 묘사(描寫)하는데 그대로 쓰여요. 이 단어들이요.
다 왕들이 갖고 있던 것들이고, 왕의 옷의 색깔이고, 사람들이 다 흠모(欽慕)하는 것들이에요. 세상 사람들 땅의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들. 그것들이 여자를 죽여요.
(요한묵시록 17:16-18) 16 그리고 네가 본 열 뿔과 그 짐승은 그 탕녀를 미워하여 벌거벗기고 처참한 지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리고는 그 탕녀의 살을 뜯어 먹고 마침내 그 탕녀를 불살라 버릴 것이다. 17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당신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을 심어 주셨고 뜻을 모아 그들의 왕권을 그 짐승에게 넘겨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18 네가 본 그 여자는 세상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도시를 가리키는 것이다.'
보세요. 짐승이 음녀(淫女)를 죽이죠? 뭐 자중지란(自中之亂)이에요, 이거? 바로 여자인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신랑의 존재 속에서, 갈비뼈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신랑과 한 몸이 되는, 그 천국 백성의 존재 방식에서 벗어나서, 자기 존재의 독자적 존재성과 독립성을 챙기려, 그 신랑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서, 하느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간음(姦淫)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 하느님처럼의 삶을 추구하는 그 일이 어디에서부터 일어났어요? 선악과에서부터 시작됐죠? 그 선악과 사건은, 곧 피조물 스스로가 선악의 주체로 서겠다고 하는, 율법주의(律法主義)잖아요?
그렇다면 짐승위에 앉아있는 간음녀는 선악과 따먹고 율법위에 앉아버린, 아담과 하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안에 들어있는 우리들. 그런데 그 율법이 자신과 간음을 하려 하는 여자를 죽임으로, 그 여자가 살아나요. 이게 바오로의 서신서에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어요.
이제 그 여자의 이야기, 신부의 이야기가 대충 감(感)이 잡히세요? 왜 그 여자들이 막 죽고, 남편이 죽고 막 이러는지. 율법이 여자에 의해 정복이 되는 게 아니라, 여자를 죄인(罪人)으로 폭로(暴露)시켜 죽이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뜻이었단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19)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 구절을 조금 풀어서 의역해 드릴게요.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에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에 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사도가 자신은 율법에게 맞아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확히 번역을 하면. ‘나는 율법에 의해 맞아 죽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율법에 맞아 죽는 것이, 하느님에 대하여 사는 거래요.
그런데 사도는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자신이 율법에게 맞아 죽은 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그래요. 그건 정작 율법에게 맞아 죽은 분이 예수! 예수님이 유대주의에게 맞아 죽었잖아요? 바리새인들에게. 그 인본주의, 율법주의를 타고 앉은 음녀는 우리란 말이에요.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요. 아닌 것 같지만, 우리는 그러한 율법지킴이나 나의 행위를 통하여, 나를 증명하고 자랑하려고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율법에게 ‘내가 그 율법에게 이제 맞아죽어야 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못 지켜요. 그런데 나는 끊임없이 나는 이 율법을 장악(掌握)하고 있다고 내가 이 율법을 파악하고 있고, 장악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걸 지켜낼 수 있다.’라고 끊임없이 우리는 우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이 율법을 시켜서 지금 얘를 죽여야 되는데, 얘가 안 죽으니까, 예수님이 율법에게 맞아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간음의, 그 주홍글씨를 뺏긴 거예요. 그냥. 하느님 가져가버린 거예요, 그 주홍글씨를. 영원히 달고 다녀야 하는 그걸. 그걸 구원(救援)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주의에 의해 발가벗겨져서, 죽으신 거예요. 성경이 경고(警告)한 일이 예수에게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 대속(代贖)의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뭐겠어요?
‘아, 내가 그 율법을 하나도, 일점일획을 지켜낼 수 없는 자이기에, 예수님이 율법에게 맞아 죽으신 거구나.’ 그게 역사 속에서 율법에게 맞아 죽는 거예요. ‘나는 아니구나.’ 이렇게.
그런데 여전히, 나는 이걸 포착하고, 이해하고, 장악하여, 지킬 수 있는 존재니까, ‘좀 지켜줘~ 지켜봐 줘봐 그리고 말씀을 빵으로 에너지로 좀 줘봐, 내가 한번 해볼게’ 이거. ‘자, 돌이 빵이 되는 거, 그거 먹고 내가 힘내서 한번 해볼게. 복음으로 말씀으로 힘내서, 진리로 힘내서, 해볼게.’ 이거. 그걸 엉터리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시도와 노력이 없다는 게 아녜요. 있어요. 그리고 그건 간절하게 우리 속에서 나와야 되는 지향성(指向性)이기도 해요. 그러나 그 노력을 통해서 어떤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걸 우리의 자랑으로 챙겨갖게 되면, 그게 바로 간음이며 실패(失敗)예요. 그런데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예수의 은혜(恩惠)에, 하느님의 은혜에, 용서(容恕), 사랑, 그 안으로 함몰(陷沒)되어 자꾸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눈에는요, 그 예수가 요한묵시록의 음녀(淫女)로 보입니다,
여러분. 포도주와 성도의 피에 취한 자라고 그러죠. 음녀를요. 예수님이 음녀가 되어서 죽었지만, 그분은 음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율법주의 관점으로 예수를 보게 되면, 그분은 성도에게 끊임없이 피를 요구하는, 그 성도의 피에 취해있는 음녀로 보이게 돼요. 그거 잘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 다음에,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했다.’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 어절을 직역하면, ‘여자의 정욕을 향해, 그것으로 여자를 보는 자 마다,’라는 뜻이에요 단순히 지나가는 여자보고 음흉한 마음이 들었다고, 이게 간음이라는 말이 아녜요. 성경은요.
그러니까 ‘너희들 다 간음한 자야~.’ 이걸 강조하려고 써 놓은 말이 아니라, 인간의 그 정욕! 그 ‘에피뚜미아’라는 단어는요, 성전제사, 희생제사라는 ‘두미에오’라는 단어에서 나온 단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성전에서 일어나는 율법의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이에요. 음욕(淫慾)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걸 뭐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그냥, 힐긋 쳐다보기만 해도 그냥, 신랑을 쥐 잡듯 잡으면서 ‘너 간음했지~?’ (웃음) ‘아, 그거 좀 쳐다보게 하세요.’ 뭐 얼마나 볼게 없으면…(웃음) 반성을 하던가. (웃음) 그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렇게 착각(錯覺)들을 하니까 묵시록 17장에서 이런 말 하는 거예요. 8절 보세요..
(요한묵시록 17:8)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것이 장차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겠지만 마침내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천지창조 때부터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짐승이 나타나는 보고 놀랄 것이다.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후에야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그 짐승을 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다.’는 건 ‘지금 존재가 소멸됐다.’는 게 아니라, 지금 못 알아보더라는 거예요. 사람들이, 지금 감추어져 있는 그 음녀를, 자기 자존심 챙기고, 義 챙기느라 못 알아보고, 속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음녀를, 지금 없는 요 왕을, ‘일곱 왕에게 속한 자인데, 여덟 번째 왕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속성을 그대로 가진 자! 못 알아봐요.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고, 하느님 이야기하고, 사랑 이야기하고, 순교 이야기하고, 헌신 이야기한다고, 다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오해(誤解)들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오히려 그렇게 인간들의 행함을 독려하여, 인간 보편의 자존심을 이렇게 세워주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그래요. 그리고 건강한 그리스도교회! 순결한 그리스도교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죠? 못 알아봐서 그래요. 그래서 시방 없다는 거예요.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는 뜻이에요. 음녀가 이렇게 시퍼렇게 내 안에 살아있는데, 그걸 감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요.
다른 거 다 잊어버려도 돼요. 그리고 다른 사람 생각할 것도 없어요. 우리가 바로 간음한 여인이고, 버림받아 마땅한 창녀(娼女)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정한 창녀가 되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간음의 주홍글씨를, 떼어버리게 된 거예요. 그 이야기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에서 잠깐 힌트 되어진 거예요.
도대체 여인의 후손, 제라, 자손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여자가 창녀가 되어, 시아버지 앞에서 창녀가 되어, 여인의 후손을 이어버리는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떡 하니 올라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은혜의 복음을 올바로 이해한 이들이, 이 세상에서, 율법 앞에서 율법에게 맞아 죽는, 자신의 처음자리를 경험하면서, 그래서 자신 때문에, 예수가 창녀가 되어서 죽으셨다는, 그 진리를 꼭 붙들게 되는 게, ‘양육(養育)’인 거예요.
그걸 ‘자라남’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걸 진짜 성화(聖化)라고 그래요. 엉터리 성화같은 거 쫓아다니지 말고 진짜 성화들 하세요. 예수의 은혜(恩惠), 십자가로 인한 진짜 성화(聖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