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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 연중 제11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13 조회수1,780 추천수2 반대(0) 신고

1독서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1,17-29
나봇이 죽은 뒤에, 17 주님의 말씀이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44

6 대당명제: 원수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라는 명제는 병행문 루카 6.27-28.32-36에도 없고 어록에도 없었다. 마태오의 가필이다. 구약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있지만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은 없다. 이는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시오에 반하는 말인데 마태오가 대당명제를 만들고자 지어낸 계명일 것이다. 43절은 빛의 아들들을 만들고자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하라는 쿰란 수도원 규범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5,44-48은 어록에서 따온 단절어 집성문이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단절어가 모여 있으니, 즉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단절어.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아무런 보수도 없다는 단절어,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단절어다. 루카의 경우 단절어들의 내용은 비슷하나 순사와 표현은 제법 다르다. 마태오와 루카의 제각기 어록을 베끼면서 각각 손질했기 때문에 순서와 표현의 차이점들이 생겼다,

 

가도와키 신부는 좌선과 공안에 의한 선 수행을 함으로써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시오라는 말씀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매우 뜻깊은 경험담이기에 길지만 옮겨실어 본다.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하는사람의 모습입니다....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될 때는 당신을 조롱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옵니다’(루카 23.34). 이것이야말로 원수를 사랑하는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성구의 배후에 그와같이 원수를 사랑하는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 모범을 본받아 그대로 실행하려고 결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은 단지 2천년 전에 존재했던 것이 되어, 그저 멀리서 나에게 호소해 올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과 나의 은 둘로 갈라져 이원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만약 당신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원수를 사랑하신그리스도의 다사로운 신심이 내 에 육박해 와서 온 을 부추겨 똑같이 원수를 사랑하는길로 몰아세우고 마침내 다사로은 생명이 넘쳐 원수를 사랑하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때 네 몸은 살아 있지만, 내 육체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다사로운 신심이 참으로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앞의 성구가 단순한 사랑의 훈계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사로운 신심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일본의 어느 선사는 이런 선 수행 방법의 독서를 몸으로 읽는 체독이라 이름하여, 입으로만 외우는 구독, 마음으로 읽는 심독보다 훨씬 깊은 독서라 한다.

 

 

44절의 원수들은 마태오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이나 종교적 차원의 원들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마치 지금 평화를 이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하느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어지듯이 원수 사랑을 뒷받침하려고 창조주의 한없는 선하심을 드러내는 사례 두 가지를 꼽는다. 이스라엘 지혜문학계에서 곧잘 창조주의 선하신 성품을 거론했다.

 

 

 

46

끼리끼리 사랑하고 인사하는 것은 어느 집단에서고 볼 수 있는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직업상 죄인인 세관원들과 인종상 죄인인 이방인들조차 끼리끼리 사랑하고 인사할 줄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질적인 사람들과도 사랑과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넘치는 일이다. 이런 삶이야말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넘치는 의로움이다.

 

46-47절에서는 직업상 죄인인 세관원들과 인종상 죄인인 이방인들을 몹시 경멸한다. 본디 유다교에서 직업. 인종. 차별 이념을 발전시켰다. 불행하게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일찍이 직업. 인종 차별 이념을 수용하여 저런 발설을 했고 그 발설이 먼저 머리에 기록되고 마침내 마태 5,46-47에 들어왔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인종 차별 이념과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직업, 인종 차별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종종 이방인들을 받아들였고, 세관원들 및 죄인들과는 친구로 지내셨다.

 

 

 

48

48절은 원수 사랑 대당명제의 결론일 뿐 아니라 여섯 가지 대당명제 전체의 결론이다.

 

병행문 루카 6.36에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어지신 대로 여러분도 어질게 되시오라 하는데, 이는 어록의 형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기의 하느님 모방 사상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라의 영향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마태오는 어록의 말씀을 옮겨쓰면서 어질다형용사 대신 완전하다형용사를 사용하여,“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라고 개작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덕을 많이 닦아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하지 않고, 여섯 가지 대당명제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율법해석과 완전해서 그 뜻을 밝혀 마땅하다. 그리스도인은 유다교의 여섯 가지 명제 대신 예수님의 율법해석 여섯 가지를 지킬 때, 특히 원수 증오 대신 원수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그럼 하느님의 완전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느님은 예수님의 여섯 가지 율법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완전하시다. 특히 원수 사랑 대당명제에서 보듯이 사람 차별을 않고 골고루 베푸는 까닭에 완전하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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