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미사)...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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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6-24 | 조회수1,16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오늘 전례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주해 29절 카리스가 “호의. 호감”의 뜻도 있으므로, 29절 끝을 “호의(친절)를 베풀도록”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문장이 가진 깊은 의미, 곧 “필요한 때에 공동체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좋은 말”이 “하느님의 은총”을 매개할 수 있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은총을 (전해) 주도록”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겠다. 30절 이사 63,10 참조: “그들은 그분의 거룩하신 영을 거역하고 괴롭혔다.” “그리스도의 몸”의 유대(끈)인 성령은 이 몸의 일치를 해치는 것을 통해서도 “슬프게”(어둡게) 된다. “속량의 날”은 “주님의 날”을 연상시키면서 심판보다는 천상에 준비되어 있고 성령으로 보증된 유산을 얻게 된다는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는 표현이다. 1.13 참조 31절 “말”에 관한 교훈에 관해서는 특히 야고 3,1-12: 구약 지혜문학서 중 특히 집회 5.14: 28,13-26 참조 32절 일부 사본에는 “우리를”. “용서하다”라고 번역된 카리제스타이는 29절에 나온 카리스(은총,호의)를 연상시킨다. 5장1절 여기 “하느님을 본받음”이라는 주제는 신약성서에서 예외적이다. 마태 5.48과 특히 성화법聖化法(레위 17-26장)에 자주 나오는 표현 참조: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참조)1고린 11.1에서 바오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듯이 나를 본받는 사람들이 되시오”라고 교우들을 권면한다. 2절 “우리를”은 일부 사본에는 “여러분을”. “제물”은 출애 29.18 참조.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은 갈라 2.20; 1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인이 사는 사랑의 삶을 위한 본보기와 원천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그리스도의 사랑임을 강조한다. 4-6장의 “형제애”에 관한 권고들도 이 바탕 위에 있다. 복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주해 둘이 함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 둘이 함께 청하면 성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앞뒤 문맥과 내용상으로 다르다. 마태오는 자기 교회의 전승을 채집하여 여기 수록하면서 손질했을 것이다. 서두의 “거듭”이 마태오의 애용어인 사실도 가필임을 뒷받침한다. 19절 <진실히>은 시나이.베자 사본 등에는 없고 바티칸 사본 등에는 있으니, 마태오가 이 부사를 썼는지 안썼는지 판별하기 어렵다. 20절 하느님이 개인 청도보다 공동 청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 까닭이 20절에 명시되어 있다. 곧,둘이나 셋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도를 드리려고 모인 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도 현존하시며 함께 간구하시는 까닭에 성부께서 더욱 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 옛날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야훼의 새 백성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시다.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시지만 특히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러 모여 있을 때 현존하신다. 이는 유다교의 하느님 현존 신앙을 그리스도 현존으로 번안한 것이다. “둘이 함께 앉아 율법의 말씀들을 연구하면 세키나(현존=하느님의 현존=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다.” 세키나는 히브리어로서 하느님을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이다. 몇 번이고 용서하라 얼마나 자주 또 많이 죄를 지었든간에 무한정 용서하라는 말씀은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당신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이나 당신에게 돌아와서는 ”회개합니다“하거든 그를 용서하시오”(루카 17.4)가 원형에 가까운 데 비해, 마태오는 많이 손질하여 베드로와 예수님이 나누는 대화체로 엮었다. 그리고 용서의 끝없음을 더욱 강조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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