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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0. 안티오코스가 화친을 제의 / 유다 마카베오[1] / 1마카베오기[2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13 조회수872 추천수2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 안티오코스가 화친을 제의(1마카 6,48-63)

 

이렇게 벳 즈카르야에서 유다가 임금의 군대에 밀리자, 임금의 군대 일부는 유다인들을 쫓아 예루살렘 성채 쪽으로 올라오고, 임금 자신은 유다 땅과 시온 산을 향하여 진을 쳤다. 그때에 그가 벳 추르 주민들과 화친을 맺자 그들이 성읍에서 나왔다. 이 땅에서 안식년을 지내느라고 양식이 없어서 더 이상 임금의 포위망을 버티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년은 기원전 164년 가을에서 기원전 163년 가을까지를 말한다. 기원전 163년에 수확하지 못한 셈이다. 그리하여 임금은 벳 추르를 점령하고 그곳을 지킬 수비대를 두었다. 그리고 여러 날 성소 앞에 진을 치고 그곳에 공격 탑들과 공격 기구들, 곧 분화기와 투석기, 그리고 화살을 쏘는 기구와 돌팔매 도구를 가져다 놓았다. ‘공격 탑은 성벽과 같은 높이에서 활이나 돌 등을 쏠 수 있도록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공격 기구들의 열거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자세한 것이다.

 

유다인들도 공격 기구들에 대항하는 기구들을 만들어 여러 날 싸웠다. 그런데 그해는 일곱째 해인 데다가, 이민족들에게서 유다로 피난 온 이들이 남은 저장 식량까지 다 먹어 버렸기 때문에, 곳간에는 양식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굶주림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저마다 제집으로 흩어져 가고 성소에는 몇 사람만 남았다. 이렇게 벳 추르가 임금의 군대에 점령되고 시온이 포위되었다.

 

한편 리시아스는 이러한 보고를 들었다. 안티오코스 임금이 죽기 전에 필리포스에게 자기 아들 안티오코스를 키워 임금으로 세우라고 분부하였는데, 이 필리포스가 임금과 함께 출정하였던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와 메디아에서 돌아와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리시아스는 급히 철군하기로 작정하고 임금과 군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양식도 얼마 남지 않았을 뿐더러, 우리가 포위하고 있는 저곳은 매우 튼튼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나라 일까지 수습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 저 사람들과 화해하고, 그들과 또 그들의 온 민족과 화친을 맺읍시다. 그리고 그들이 전처럼 자기들의 관습대로 살아가도록 해 줍시다. 우리가 저들의 율법을 폐기하였기 때문에, 저들이 화가 나서 이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튼 리시아스가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말한 화해하고의 직역은, 진정으로 오른손을 내미는 것은 화해의 몸짓이다(11,50.62.66; 13,45.50). 이러한 상황의 급변은 강압적으로 그리스화를 추진하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죽은 데다, 리시아스의 군대에 식량이 떨어져 가고 그의 정적인 필리포스가 곧 돌아온다는 사실로, 성채를 포위한 리시아스의 마음을 솔직히 엿볼 수가 있다고 여겨진다. 아무튼 이 제안은 임금과 장수들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임금은 유다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하고, 유다인들은 안티오코스가 화친을 제의한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임금과 장수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자 마침내 그들이 요새에서 나왔다. 그러나 임금은 시온 산으로 들어가 그곳의 요새를 보고는, 자기가 맹세한 약속을 저버리고 그 둘레의 성벽을 헐어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임금은 서둘러 그곳을 떠나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는 필리포스가 그 성읍을 장악한 것을 보고, 그와 싸워 무력으로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

 

안티오코스가 유다와 화친을 맺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후였다.[계속]

 

[참조] : 이어서 ‘21. 데메트리오스 일세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벳 즈카르야,벳 추르,투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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