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17 조회수1,747 추천수2 반대(0) 신고

0717. 연중 제16주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오늘 <말씀전례>는 “환대” 곧 “손님맞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는 “주님 섬기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환대”는 곧 “섬김”을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나그네에 대한 아브라함의 환대(손님맞이)를 들려주며, 

 

<제2독서>에서는 이방인과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복음의 환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와 마르타의 환대를 통해, 진정한 손님맞이와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강론>은 이러한 “환대”라는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알아들어 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의 앞 장면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강도를 맞아 초주검된 사람에 대한 ‘환대’에 대한 이야기로, 그 앞 장면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섬기는 환대와 이웃을 자신처럼 환대하는 ‘주님 섬기기’와 ‘형제 섬기기’에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마르타는 마을 어귀에까지 나가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여 온갖 시중으로 섬기는 예수님 몸에 대한 환대를 베풀고 있다면, 마리아는 발치에 앉아 귀 기울여 말씀을 경청하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환대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두 개의 ‘환대’와 ‘섬기기’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의 환대는 칭찬을 받고 마르타의 환대는 꾸중을 듣게 되는 것일까요? 대체, 이들의 환대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대체, 진정한 환대와 섬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손님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맞이하는 일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는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규칙서 51,1).   

 

그렇습니다. 진정한 환대는 대하는 모든 이를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는 일입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일이요, 그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손님의 말씀을 먼저 듣게 되고, 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요, 더 큰 환대가 됩니다. 이러한 환대는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살아있는 성체조배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마리아는 그렇게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 섬기기’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 순간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실 마리아는 지금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셈입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자신에게 시중들고 봉사하게 해드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께 시중 받고 있고, 섬김 받고 있으며, 환대받고 있는 중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 석상에서 자신의 발을 씻겨주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갖지 못한다.”(요한 13,8). 

 

그렇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섬김 받고 섬기고 있는 ‘상호 섬김’은 서로를 한 자리에 있게 하고, 서로의 면전에 있게 합니다. 곧 그분은 마리아의 면전에서 말씀으로 섬김을 행하시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귀 기울여 들음으로 섬김을 행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르타는 예수님 면전에 있지 못하고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고 자신을 섬기고 있는 꼴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와 마르타의 환대와 섬김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곧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기보다 자신이 주님이 되어버린 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조정하여 동생더러 자신을 도우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진정 당신을 섬기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이요,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관상의 도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그렇습니다. 결코, 빼앗겨지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는 ‘이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이 사실을 먼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이 “한 가지”만 지니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전부’인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반복되고 있는 “주님”이라는 “한 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환대하는 일, 주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일,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실상 필요한 한 가지’요, ‘전부인 한 가지’이며, 결코 빼앗겨지지 않으며, 그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거부될 수 없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행복하고, 이 “한 가지”로 이미 더할 수 없이 충만하기에, 그 어떤 것도 이 행복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할 “환대”는 자신이 주님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자신을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동시에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진정한 환대요, 주님 섬기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 안에서 이러한 주님 섬기기를 할 수 있고, 살아있는 성체조배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주님! 

 

이 한 가지로 하여, 가난을 기쁨으로 살겠습니다. 당신께 속한 자만이 진정 가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가지로 하여, 낮추어 섬기겠습니다. 속한자만이 진정 낮아질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전부를 하는 이 신령스런 일이 바로 당신의 소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실상 필요한 한 가지, 주님이신 당신을 주님 되게 하는 일, 바로 그 일만 하게 하소서! 아멘.   

 

(이 영근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