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4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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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7-23 | 조회수1,36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그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와 함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낸다. 제1독서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어도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해 12절 “세례로”: 이 말로써 은유는 끝난다.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세례” 등 세 표현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는 육체와 상관없이 그 굴레를 벗어나서 행해진다. 세례는 새로운 할례로서 손으로 거행하지 않는,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할례다. 이는 3,5,9에서 다시금 언급된다. 이 새로운 할례는 회개이며 옛것의 속박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마치 구약에서 할례가 야훼 백성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지였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세례가 그리스도에게 속함을 나타내는 구원의 표지다. “함께 묻혔고”: 이 “함께”는 세례를 특징짓는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죽은 이 가운데서 일으키신”: 이미 바오로 전부터 전승되는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 양식이다. “믿음으로”: “믿음을 통하여”로 직역할 수 있다. 우연은 없으며 예수 부활을 이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근거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분”: 그리스도 “함께 일으켜졌습니다”: “함께 묻혔으며”와 더불어 세례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함께 일으켜졌습니다”는 이미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그분과 함께 살 것”으로 표현된 로마 6.4.5.8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로마서와 달리 골로사아이서에서는 세례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선사되는 인류 구원사건이 개개인의 세례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13절 “또한”: 이로써 13절은 앞 구절과 병렬관계에 있다. 이제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내용을 더 구체화시킨다. 즉, 9절에서 호티(“왜냐하면 ... 때문입니다)와 관련된 근거제시는 12절에서 끝난다. 13절에서는 1,21. 22-23에서처럼 대조적인 장면이 펼쳐진다(“함께 ...이제”) “죽었지만”: “묻혔고”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으신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전과 후의 처지를 대조시킨다.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14절 “빚문서”는 하느님의 “부기”에 대한 표상으로서 그분의 의로우심과 심판의 토대를 대변한다(즈가 3,1-7 참조). 세례를 통해 구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결과적으로 빚을 탕감받고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과의 평화를 이룩하게 된다. 구원사건을 핵심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죄의 용서 차원에서 바라본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를 극복했다고 본다.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주해 주님의 기도 루카는 11.1-13에 기도에 관한 전승들을 모아놓았다. 주님의 기도는 어록에서 따왔고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 비유는 특수사료에서 옮겼으며, 청하면 주신다는 단절어와 아들의 청을 들어주는 아버지 비유는 또다시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마태오에는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계기가 없다. 그런가 하면 루카는 단순히 “아버지”라 부르는데 마태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고쳤더. 또한 루카에는 다섯 가지 청원기도가 있는데, 마태오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를 덧붙여 일곱 가지 청원기도를 만들었다. 루카에 수록된 다섯 청원기도 가운데 앞의 두 청원기도는 신국 도래를 비는 것이요, 뒤의 세 청원기도는 제자들이 신국 도래를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만을 비는 것이다. 1절 루카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자주 말한다. 2절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대화. 따라서 상대를 부르게 마련이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아버지”라 하나 실제로 예수님은 아빠라 하셨다.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이름”은 정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청원기도는 아버지의 거룩한 정체가 환히 드러나기를 비는 것이다. 지금은 숨어계신 성스러운 하느님이 마침내는 환희 드러나시기를 비는 종말론적 청원기도다. 예수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다. 하느님은 자연계와 인류 역사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스리시나 이는 은밀한 통치요 미완성 통치다. 그러나 종말이 되면 하느님은 드러나게 또한 결정적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여기서는 그 종말론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빈다. 2절의 두 청도는 유다교 회당 예배를 끝맺을 때 드리던 카다쉬 기도문의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당신 뜻대로 지으신 이 세상에서 당신 이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되소서. 또한 빨리 서두르시어 여러분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이 나날(을 살아가는) 동안, 온 이스라엘 집안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나라를 세우소서.” 3절 빵을 수식하는 낱말은 매우 희귀할뿐더러 그 뜻이 자못 불분명하다. 그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에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은 내일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그 날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참작하고, 아울러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루 동안 먹을 만큼의 만나만 매일 아침 거두었다는 고사를 연상한다면 에피우시오스를 “일용할”이라 의역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마태 6,11에서는 “우리가 일용할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라 하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일용할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라 한다. 루카가 “오늘”을 “날마다”로 고쳤을 것이다. 이 청원기도는 몇몇 부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나날을 살아가던 제자들, 아무것도 갖지 않고 전도하러 떠나던 제자들이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면서 오늘 하루의 음식을 청하는 기도다. 4절 같은 내용의 청원기도가 마태 6.12에 있는데 낱말과 시제가 약간 다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빚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 호바는 본디 빚을 뜻하지만 죄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사상은 마르 11.25; 마태 5,23-24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가이없는 용서를 체험해야만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도랑이 생기는 법이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더러 바칙 하신 청원기도이므로, 여기 “유혹”은 제자임을 포기시키려는 유혹이겠다. 5절 5-7절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있는데 그 본래 뜻이 변절되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비유란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려고 빵 세 개를 청하는 친구를 좀 성가시다 해서 물리치다가 너무나 귀찮게 구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 청을 들어주었다 하니, 근동인들의 우정과 손님접대를 중히 여긴 사실로 미루어 매우 부자연스럽다. “여러분 가운에 어느 누가”로 시작하는 비유는 으레 “...하겠습니까?” 또는 “...하지 않겠습니까?” 로 끝맺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 7절만은 의문문 대신 서술문으로 끝맺는다. 7절 예수께서는 “할 것입니다”대신 “하겠습니까?”로 비유를 끝맺었을 것이요, 청중은 강력히 부인하여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 했을 것이다. 정말 친구의 청을 즉시 들어주겠지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이제 비유의 본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곤경에 처한 친구의 청을 들어줄 안다면 하물며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곤경에 처한 자녀들의 청을 안들어주실 리 만무하다! 사악한 인간과 선하신 하느님을 비교하는 대비논법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121,11-13;18.2-7ㄱ의 대비논법을 참조하라. 8절 8절은 루카 특수사료를 전한 전승자 또는 루카복음 저자 자신이 만들어 덧붙인 것이다.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재판관 비유의 영향을 받아 8절을 지어넣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결과 하느님은 곤견에 처한 인간의 청원기도를 즉각 들어주신다는 비유 본래의 뜻이. 항구한 청원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탈바꿈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개신교는 우리의 갈라진 형제가 맞는가? 개신교회를 다니는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어떻던가요?" "예 오늘은 원로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어요" "거 봐요. 오늘은 노인의 날이라고 하였잖아요." "예. 새겨 들었습니다."그리고는 웃음을 짓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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