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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 연중 제20주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8-13 조회수557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예레 15,10).>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8,4-6.8-10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치드키야 임금은 대신들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 예언자를 저수 동굴에 가우었다가 악을 지절러서는 안 된다는 에벳 멜렉의 말을 듣고 그를 꺼내도록 한다.

 

 

 

 

 

 

 

 

2독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시련중의 인내

10, 36-39에서 예고한 인내와 믿음 가운데, 믿음에 관해서는 먼저 11장에서 길게 언급했고, 이제 12,1-13에서는 시련중에 필요한 인내에 관해 말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인내로이 달려야 할 길을 달리라고 말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인내로이 달려야 할 길을 달리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시편의 의미와 결과를 밝힌다.

 

시련은 부모이신 하느님이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내리시는 교육적 견책이다. 이러한 시련을 존경과 순종의 자세로 잘 참으면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다. 이 항목의 주요 단어는 인내”,“견책”,“교육등이다.

 

1

12,1-311장에서 제시한 조상들의 믿음을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할 때에 흔히 겪어야 할 시련을 끈기있게 참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시련을 훌륭하게 견디어낸 분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신 예수를 표본으로 내세운다.

 

믿음의 길이나 시련중의 인내는 고대 문헌이나 신약성서에서 흔히 운동 시합이나 경주에 비유된다. 바오로는 1고린 9,24-27에서 경기장에서 끝까지 달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여기서는 모든 장애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경기를 인내로서, 꾸준히 하라고 한다.

 

2

기쁨 때문에는 "기쁨 대신에"로 번역할 수가 있는데 그 경우에는 기쁨을 포기하고서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시어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터 놓으셨다. 그런 면에서 그분은 믿는 이들의 선두 주자요 모퉁이실 뿐 아니라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따라서 믿는 이들이 시련을 인내로이 극복하려면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과 반대를 기억하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4

박해 때의 순교를 암시하는 것 같다. 특히 인용문이 박해하는 사람들에 관한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을 낳는다.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단락은 대별하여 두 가지 단절어가 겹쳐 있는데, 첫째 것은 루카복음에만 있고 둘째 것은 마태 10,34-36에도 있다. 어록에는 루카복음에서처럼 둘다 한자리에 실려 있었을 것이다. 어록의 전승자나 작가는 49-50절과 51-53절에 같은 낱말들이 있는 것을 보고서 두 단절어를 한곳에 모았다. 소위 연쉐어 연결이다.

 

49

49-50절의 불과 세례 상징어는 그 전승과정과 뜻을 밝히기 매우 어렵다. 우선 예수 친히 이 상징어를 발설하셨는지, 일단 그러셨다 할지라도 한꺼번에 발설하셨는지 판단하기 곤란하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49-50절을 발설하셨다는 가정 아래 감히 그 뜻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 또는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이라고 했다. 그처럼 예수께서도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이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49절의 뜻인즉, 당신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고 그 선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열망하신다는 것이다.

 

50절의 내가 받을 세례는 다가올 죽음을 뜻하리라.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고하면서 초조해하신 셈인데 그분의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완연하다.

 

51

51-53절의 말씀은 어록을 옮긴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마르 3.12에도 있다. 묵시문학계에서는 역사의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우주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붕괴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러니 여기 가정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한 가지 전조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정이 분열된 것도, 제자들의 가정이 분열된 것도 종말 전조로 이해하셨을 것이다.

 

53

53절은 미가 7.6을 자유로이 인용한 것.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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