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1 연중 제21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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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20 | 조회수56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들은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데려 오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겠다고 하신다. 제2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주해 6절 잠언 3,11-12.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는 흔히 이 잠언의 내용과 비슷한 고통의 신학을 전개한다. 이에 따르면 고통과 시편은 하느님이 배척하시는 표지가 아니라 그분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는 표지다. 하느님은 때때로 시련을 주어 당신 백성을 교육하고 파국에서 보호하신다. 7절 직역하면 “견책을 위해 참으십시오”. 견책은 훈육, 교육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으나 4-13절에서는 견책의 의미로 쓰인다. 고대의 아버지의 자녀 교육은 흔히 사랑으로 견책하는 것이었다. 아니,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자녀를 올바로 교육하기 위해 때때로 사랑의 매를 든다. 하느님도 당신 자녀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 12절 12-13절은 이사 35.3과 잠언 4.26의 인용문. 저자는 두려움,나약, 피로 등에 휩싸인 독자들이 시련의 의미와 가치를 잘 때닫고 다시금 바르고 안전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권한다.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주해 22절 구원과 멸망 13.22-30가운데서 22-23절은 루카의 가필이며 그 나머지 24-29절은 어록에서 옮긴 것이고 마지막 30절은 마르 10.31을 약간 고친 것이다. 어록에서 옮겨쓴 24-29절이 마태오복음에는 7.13-14: 35,10-12: 7,22-23: 8,11-12에 흩어져 있다. 루카와 마태오 가운데 어느 쪽이 어록의 형태를 더 잘 보존했는지 속단할 수 없는 실정이다. 어록의 형태야 어쨌든 구전과정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상징어, 문을 받아 버리는 집주인의 상징어,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버림받는다는 단절어, 하느님 나라 잔치에 관한 단절어는 따로따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22절을 가필로 보는 까닭은 이렇다. 루카는 예수께서 상경중이라는 말을 자주 만들어 덧붙인다. “도시들과 마을들을”은 직역하면 “도시들과 마을들을 따라”인데, 같은 표현이 8.1(“도시와 마을을 따라”),9.6(“마을들을 따라”)에도 나온다. “지나가다”는 통과하다는 뜻으로서, 신약성서 가운데 로마 15,24를 제외하면 루카 6.1: 13.22: 18.36: 사도 16.4에만 나온다. 23절 23절도 가필일 것이다. 루카는 가끔 예수님의 훈계 앞에 질문을 덧붙인다. 문제를 살펴보아도 “그런데 ...하자”、“...향하여 말씀하셨다”는 루카의 문제임에 틀림없다. 묵시문학계에서는 종말에 구원될 사람들의 수효에 관심이 많았다. 24절 24절 상징어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지금 회개해야지 안 그러면 회개하려 해도 시간적 여유가 없으리라는 뜻이겠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회개를 뜻하리라. 앞뒤 문맥을 참작하여 루카의 사상을 밝히면 이렇다. 예수께서는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효에 관한 묵시문학적 질문을 일축하시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 해도 못 들어 갈 것이니 거기에 들어갈 수 있게끔 지금부터 노력하라고 촉구하신다. 그러니까 루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신국 진입으로 이해했다. 병행문 마태 7,13-14는 마태오가 어록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25절 24절(“좁은 문”)과 25절(“닫힌 문”)은 “문”이라는 연쇄어로 연결되었다. 25절의 상징어에서는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아 버리면 밖에서 열어 달라고 두드려도 소용없다 한다. 그 뜻인즉, 하느님이 단죄하는 심판을 내리고 나면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25절과 매우 비슷한 말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 가운데 들어 있다(마태 25,10-12). 26절 26-27절만 따로 보면, 여기 종말심판관은 분명히 예수님이시다. 이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을 반영한다. 사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종말심판관으로 신봉했다. 그러므로 26-27절은 예수님의 발설이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 종말심판관이신 예수님은 심판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실까? 평소에 당신과 함께 식사하고 당신 가르침을 받은 사실에 따라, 곧 친분관계에 따라 심판하시지 않고, 정의 실천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 따라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단죄받을 것이다. 마태 7,22-23에 병행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약간 다르다. 초대교회의 성령 운동가들이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당신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께서 새롭게 풀이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면 단죄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한다. 27ㄴ절은 시편 6.9의 개작. 28절 28-29절에보다 마태 8,11-12에 어록의 단절어가 더 충실히 수록되어 있는 까닭에 이를 간략하게 풀이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둠속으로 쫓겨날 것이니 거기서는 울고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이방인들은 축복을 받고 유다인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인데, 이는 어록의 말씀 가운데서 이방인들에게는 가장 호의적이고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말씀이다. 이보다는 덜 강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어록에 더러 있다.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신 이적사화,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대한 불행선언,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에 관한 단절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관한 단절어를 예수님 친히 발설하셨든 어록의 전승자 또는 작가가 발설했든간에 그렇게 말한 이는 유다인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이방인 전도에 주력했을 것이다. 30절 30절은 유행어, 루카는 마르 10.31을 조금 손질하여 옮겨실었을 것이다. 앞의 문맥에 따라 그 뜻을 풀이한다면, 이방인들 가운데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다인들 가운데도 거기서 쫓겨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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