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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7. 오니아스의 등장 / 탄압받는 유다[1] / 2마카베오기[7]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8-25 조회수514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 오니아스의 등장(2마카 4,4-22)

 

이렇게 오니아스 대사제는 분쟁이 심각해지고, 메네스테우스의 아들이며 코일레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총독인 아폴로니우스가 시몬의 사악함을 부추기고 있는 것을 보고 의를 저버릴 수가 없어 임금을 찾아갔다. 이는 자기 동족을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온 백성의 안녕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임금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 지방 행정이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시몬은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니아스가 셀레우코스에게 시몬을 고발하였다.

 

셀레우코스가 생을 마감하고 에피파네스라고 하는 안티오코스가 왕좌를 이어받았을 때,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방법으로 대사제직을 차지하였다. 여기 등장하는 안티오코스는 기원전 175-164년에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린 안티오코스 4세이다. 그리고 야손은 히브리 말 이름 여호수아 또는 예수를 그리스 말식으로 옮긴 것이다. 야손은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은 삼백육십 탈렌트와 또 다른 수입에서 팔십 탈렌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것에 덧붙여, 자기의 권한으로 체육관과 청년 학교를 설립하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안티오키아 시민으로 등록하도록 임금이 승낙해 준다면, 백오십 탈렌트를 더 바치겠다고 언약하였다. “청년 학교는 젊은이들이 본격적으로 시민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특히 체육관에서 신체적, 지성적인 교육을 시행하는 그리스식 양성 기관을 말한다. 또한 안티오키아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동쪽 수도이다. 야손의 계획은 자기 동포들에게 이 수도 시민의 특권을 누리게 해 주려는 것보다는 예루살렘을 안티오키아라는 이름 아래 완전히 그리스식으로 바꾸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임금의 허락을 받은 야손은 그 직위에 오르자마자 동족의 생활 방식을 그리스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다인들이 에우폴레모스의 아버지 요한을 통하여 다른 임금들에게서 얻은 특전들을 폐기시켰다. 요한은 전에 로마인들과 우호 동맹을 맺기 위하여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다. 야손은 법에 맞는 생활양식을 없애 버리고 법에 어긋나는 새 관습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신이 나서 성채 바로 밑에 체육관을 세우고 가장 뛰어난 청년들에게 그리스식 모자를 쓰게 하였다. 이렇게 사악한 사이비 대사제 야손의 극심한 패륜으로, 그리스화와 이국 풍습의 도입이 극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사제들은 제단에서 봉사하는 일에 열성이 없어져, 성전을 경시하고 희생 제물 바치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징이 울리기가 바쁘게 그들은 레슬링 경기장으로 달려가 법에 어긋나는 경기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조상들이 명예롭게 여긴 것을 멸시하고, 그리스인들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 때문에 무서운 재앙이 그들에게 닥쳤다. 그들이 그리스인들의 생활 풍습을 열심히 따르고 모든 면에서 저들과 같아지려 하였지만,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적대시하고 억압하였던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다음 시대가 그 사실을 밝혀 줄 것이다. 네 해마다 티로에서 열리는 경기에 임금이 참관하였는데, 비열한 야손은 예루살렘의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대표하는 사절들을 뽑아 파견하면서, 헤라클레스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칠 비용으로 은 삼백 드라크마도 가져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을 가져가는 이들은 그 돈을 희생 제물의 비용으로 쓰는 일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다른 데에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돈을 보낸 자는 헤라클레스 신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 데에 쓰라고 하였지만, 그것을 가져가는 이들의 결정에 따라 삼단 노를 갖춘 군선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메네스테우스의 아들 아폴로니우스가 필로메토르 임금의 즉위식에 참석하도록 이집트로 파견되었을 때, 안티오코스는 필로메토르가 자기의 정권에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여기서 필로메토르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야포에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그는 야손과 이 도성 주민들이 횃불과 환성으로 성대하게 환영하는 가운데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페니키아로 진군하였다. 이처럼 못된 야손이 오니아스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리스 문화를 끌어들였다.

 

세 해 뒤인 기원전 172년 말이나 171년 초쯤에 야손은 앞에서 말한 시몬의 동생 메넬라오스를 보내어, 임금에게 돈을 가져가고 몇 가지 필요한 일에 관하여 결정을 받아 오게 하였다.[계속]

 

[참조] : 이어서 ‘8. 오니아스의 죽음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메네스테우스,페니키아,아폴로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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