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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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28 | 조회수86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께서는 명령하신 모든 것을 유다인들에게 말하라시며, 그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다.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주해 요한 세례자의 죽음 이스라엘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1세기 말엽 유다교사를 집필했는데 그 책 18권 116-119항에서 세례자의 말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 군중이 요한의 말을 듣고 매혹되어 모두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군중이 요한의 권고에 따라 무엇이라도 할 것 같았으므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폭동을 일으키진 않을까 두려워했다. 따라서 헤로데는 무슨 변란이라도 일어나서 난처한 처지에 빠져 후회하느니보다 차라리 사건이 진전되기 전에 그를 없애버리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헤로데의 이러 의구심 때문에 요한은 체포되고 마케루스 천연요세로 이송되어 거기서 죽임을 당했다. 요세푸스의 기사는 역사적 신빙성이 짙다. 그에 의하면, 헤로데는 정치적 동기로 요한을 처형했는데 그 장소는 사해 동쪽에 자리잡은 마케루스 요세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5,17-29에서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전설을 수록했다. 17절 헤로데 대왕은 아내를 십 명이나 거느렸다. 마리암느 1세와의 사이에서 아리스토불이 태어나고 이자에게서 헤로디아가 태어났다. 그러니 헤로디아는 대왕의 손녀다. 마리암느 2세와의 사이에서 별명이 전해오지 않는 헤로데가 태어났는데 이자가 헤로디아의 첫 남편이다. 이 결혼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났다. 말타케와의 사이에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태어났는데 이자는 갈릴래아와 베리아 지방 영주로 군림했으며 나바테아 왕국 아레타 4세의 딸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필립보가 태어났는데 이자는 이두래아의 트라고니티스 지방 영주로 군림했으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그러니 필립보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그러니 필립보는 헤로디아의 남편이 아니라 사위였다. 17절의 기사는 오보다. 18절 헤로데 안티파스는 이복 동기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는 유다교법으로 금지된 일이다. 22절 “그의 딸 헤로니아”대신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비롯하여 일부 사본에서는 “(그) 헤로디아의 딸”이라 한다. 여하튼 헤로디아의 딸 이름은 살로메였다(유다고사 18,136). 공주가 남자 손님들 앞에서 춤추는 법은 없다. 창녀들이나 연회석상에 무희로 등장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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