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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 야손의 최후 / 탄압받는 유다[1] / 2마카베오기[10]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8-30 조회수398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0. 야손의 최후(2마카 5,1-10)

 

안드로니코스의 악행으로 오니아스는 불의하게 살해당하고 메넬라오스의 악행에 대한 원로단의 고발을 기각하고, 오히려 그 신고자에게 죄를 뒤집어 사형 선고를 내린 일로 유다의 많은 이가 임금의 불의한 처사에 혐오감을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넬라오스는 권력자들의 탐욕 덕분에 대사제직을 유지하면서 줄곧 악에 집착하여 동족을 반역하는 원흉이 되었다.

 

그 무렵에 안티오코스가 제이차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였다. 기원전 168년의 일이다. 일차 원정은 기원전 169년에 있었다(1마카 1,16 참조). 그의 욕망인 이집트 땅까지 지배하여 두 나라의 임금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실로 짠 옷을 입고 창으로 무장한 기병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 거의 사십 일 동안 온 도성 상공에서 이리저리 치닫는 일이 일어났다.

 

칼을 빼 든 그 기병대들은 전열을 갖추고 서로 공격과 반격을 되풀이하였는데, 방패들이 휘둘리고 창날들이 숲을 이루며 화살들이 흩날리고, 금장식 마구들이 번쩍이고 온갖 종류의 갑옷이 번뜩였다. 한 기병대는 적어도 25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하권의 저자는 이 부분에서 당대의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매우 정확한 군사 용어들을 사용한다. 이 발현을 지켜본 이들은 그것이 모두 좋은 징조이기를 바랐다.

 

이런 기병대의 발현과 같은 비슷한 내용은 요세푸스도 그의 유다 전쟁사에 언급되어 있다. 그때에 안티오코스가 죽었다는 이상한 헛소문이 떠돌았다. 그러자 야손은 천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갑자기 이 도성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오니아스의 동생으로 불의한 방법으로 대사제직을 차지하였던 자다(2마카 4, 7 참조).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쫓겨 가고 마침내 도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메넬라오스는 성채로 달아났다. 야손은 자기 동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포들을 희생시켜 얻는 성공이 가장 큰 불행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승리가 적군을 누르고 얻은 것이지 동족을 누르고 얻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사제직을 차지하지 못하고, 마침내 모반 때문에 수치를 당한 채 다시 암몬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아라비아인들의 통치자 아레타스에게 감금되었다가, 모든 이에게 쫓겨 이 성읍 저 성읍으로 도망 다녔으며, 법을 배신한 자로 미움을 받고 조국과 동족을 박해한 자로 혐오를 받다가 이집트로 쫓겨났다. 아레타스는 나바태아인들의(1마카 5,25 참조) 임금을 말하며, 그들은 대상 행상을 주로 하는 민족으로 요르단 동쪽 고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임금이 아레타스라는 이름을 지닌 첫 번째 임금은 분명 아닐 것이다.

 

아무튼 수많은 사람을 조국에서 추방하였던 야손은 라케대모니아인들에게 건너가서 조상이 같다는 사실에 호소하며 피난처를 구해 보려고 하였으나 이국땅에서 죽고 말았다. 라케대모니아인은 스파르타인을 가리킨다. 당시에 이들과 유다인들 사이는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전승이 있었다(1마카 12,21 참조). 그리하여 그 많은 사람을 묻어 주지 않고 내던져 버렸던 그가 죽자, 아무도 곡해 주지 않았고 어떠한 장례식도 치러 주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조상의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하였다. 이렇게 비열한 야손의 최후는 참으로 끔찍했다.

 

그렇게 야손의 죽음에 관한 보고가 임금에게 들어가자 그는 유다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였다.[계속]

 

[참조] : 이어서 ‘11. 안티오코스의 악행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야손,오니아스,아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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