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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보상의 역설: 왜 예수님은 배신자 유다를 검증도 없이 뽑으셨을까?
작성자김글로리아7 쪽지 캡슐 작성일2022-09-05 조회수1,454 추천수3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보상의 역설: 왜 예수님은 배신자 유다를 검증도 없이 뽑으셨을까?>

 

 

 

 

복음: 루카 6,12-19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성당에서 보면 어떤 일을 잘하면 상을 주는 식의 사목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를 많이 하면 상을 준다거나, 어떤 단체에 대해 점수를 매겨서 높은 단체에 상을 주는 식입니다. 이런 식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주는 일은 진짜 좋은 성과를 내게 할까요? 같은 예로 만약 아이들에게 성적이 오르면 스마트폰을 바꿔주겠다는 식의 보상을 주는 것은 효과가 있을까요? 

 

 

    수년간 많은 과학자가 행동 활성화의 효과를 입증하는 다수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한 사례에서는 과학자들이 담배를 끊으려는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추적했습니다. 이들은 흡연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고 8주 동안 금연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한 그룹에는 금연 프로그램에 참여한 보상으로 머그컵이나 하와이 여행 응모권 등을 주었습니다. 반면 통제 집단에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받은 피실험자들은 금연 프로그램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처음에는 보상이 꽤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3개월 후 금연 성과를 확인했을 때 두 그룹 사이에 눈에 띄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1년 뒤에는 보상그룹의 참여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금연을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다른 연구사례도 있습니다. 버지니아 폴리테크닉대학교의 E. 스콧 갤런은 안전띠 착용과 관련해 스물여덟 건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6년간 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인 다양한 연구 결과를 모두 검토하고 나서 안전띠 착용에 대해 금전적인 보상이나 선물은 주는 방법은 거의 효과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독서를 한 학생에게 보상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나서도 여러 프로그램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나서도 보상에 따른 어떠한 장기적인 효과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흉흉한 마을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마을에 사는 불만 가득한 십 대 몇 명이 모여 그 노인을 곯려주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노인의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은 마당에 나와 10대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나타나자 노인은 모두에게 5파운드씩 나눠주면서 앞으로도 계속 욕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아이들은 일단 돈을 받고 욕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노인은 매일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그다음 주는 약간 달랐습니다. 노인은 아이들에게 돈이 별로 없다고 사정을 하고는 1파운드만 주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돈을 받아 가며 계속 욕을 해댔습니다. 

    세 번째 주가 되자 또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노인은 아이들에게 상황이 너무 안 좋아 20펜스밖에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적은 금액에 모욕감을 느낀 아이들은 급기야 욕을 중단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누가 지어낸 이야기일 테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근본적인 동기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즉 행위에 대한 보상을 제안받은 사람들은 행위와 보상을 동일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행위가 보상을 위한 숙제요 부담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런 제안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 행위 자체를 보상으로 여겨서 그 행위를 멈추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행위는 감정의 산물입니다. 행위를 바꾸려면 감정을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행위에 따라 감정이 변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행위가 감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웃으니 행복하다는 등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은데 억지로 하는 행동은 장기적으로 감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웃음 치료와 같은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계속 불안한데 억지웃음만 웃으면 감정이 좋아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행위를 만듭니다.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배를 타고 있는 나에게 어떤 배가 와서 부딪쳤을 때 화가 났다가도 그 배가 빈 배였다면 화가 사라집니다. 이는 분명 그 배 안에는 멍청한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된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바꾸려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감정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믿음에서 오기에 그런 감정을 갖게 만드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은 은총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항상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믿음은 내가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성체를 주셨습니다. 성체가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믿게 하고 또 이미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 믿음 때문에 좋은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먼저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사도로 선출되었다는 기쁨에 좋은 행동이 나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리옷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께 사도로 뽑혔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믿음은 선택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에덴동산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이 뱀이 하는 일입니다. 바닥에 있다고 믿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늘을 날고 있다고 믿으면 모든 뱀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믿음은 내가 그 사람이 되었다고 믿으며 행하는 작은 행동들로 확고해집니다. 세례가 뽑히는 것이라면 견진은 그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하는 작은 행동들입니다. 

 

 

    제임스 클리어는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살을 빼려거든 살을 빼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정체성을 바꿈 없이 목표를 세워봐야 제자리라는 것입니다. 술과 과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바꾸지 않으면 10kg 감량은 물 건너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하면 확고해질까요? 걸음마를 통해서입니다. 안 되지만 자꾸 해봄으로써 믿음이 확고해지는 것입니다. 

 

 

    안전장치 하나도 없이 손가락 한두 마디로 버텨야 하는 ‘프리 솔로’ 암벽등반으로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975m에 달하는 바위산 ‘엘 카피탄’을 오른 ‘알렉스 호놀드’는 어떻게 그 산을 오를 수 있는 믿음을 얻었을까요? 거의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안전장치를 이용해 50번을 등반하고 나서야 그런 믿음이 생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면허를 따고 운전대를 잡으면 도로에 나가기 두렵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다 보면 그런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만 아니면 초보 때 두려워할 때보다 훨씬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유태인들이 세상에서 큰 성과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미 그런 성과를 내도록 뽑혔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노력해서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임을 증명하려는 삶이 아닌, 이미 뽑힌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먼저 되었음을 믿어야 그렇게 되어갑니다. 

 

 

    담배를 끊은 이후의 삶을 기대하며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과 결국엔 누가 담배를 끊을 수 있게 될까요?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끊게 됩니다.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로 불러주셨음을 자기 행동으로 증명하고 확인받으려고 하는 사람과 그냥 믿어버리고 사는 사람과 누가 잘 살 수 있을까요? 의심 없이 사제로 불림을 받았음을 믿는 사람이 잘 살 것입니다.

    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천생연분임을 증명하려는 사람과 하느님께서 천생연분이기 때문에 맺어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누가 잘 살까요? 이미 주님께서 그렇게 맺어주셨음을 믿는 부부가 잘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미리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훌륭한 사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미 그런 행동을 할 존재로 불림을 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이미 받았다고 믿으면 꼭 받게 될 것입니다.

 

 

 https://youtu.be/tYhz96-OqdY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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