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4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9-10 조회수1,091 추천수6 반대(0)

가끔씩 한국영화를 보는 것은 뉴욕에서 누리는 작은 즐거움입니다. 걸어서 1시간 거리에 한국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있습니다. 운동 삼아 걸어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곤 합니다. ‘한산도 보았고, ‘비상선언도 보았습니다. 오늘은 비상선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 바이러스로 인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한 명, 두 명 환자가 생기면서 승무원과 승객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생각해 낸 방법은 환자를 격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진자는 뒤 칸으로 가고, 건강한 사람은 앞 칸으로 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확진자는 점차 늘어나고 이제 건강한 사람조차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확진자와 건강한 사람을 나누는 과정에서 과학적인 이성은 존재하지만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남은 건강한 사람도 확진이 되고 말았습니다. 맞습니다. 바이러스를 막아내는 것은 확진자를 격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치료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거대한 제약회사는 그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배양하는 과정에서 유출하게 되었습니다. 치료제를 개발했으면서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제약회사가 치료제를 공개하고 유감을 표명하였습니다. 한 형사가 스스로 치료에 동참하면서 치료제의 효능이 입증되었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비행기의 착륙입니다. 비상상황에서 기장이 비상선언을 선포하면 가장 가까운 공항에서 활주로를 열어주는 것이 국제적인 관행입니다. 바이러스에 의한 기내 감염은 당연히 비상상황입니다. 기장이 비상선언을 선포했고 곧 가까운 공항에 착륙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공항이었던 하와이의 공항은 바이러스의 치료제가 아직 없다는 이유로 착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되돌아 와야 했던 비행기는 일본의 공항에 착륙을 요청했습니다. 치료제가 있다는 것도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본 역시 치료제의 효능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착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는 이제 한국의 공항으로 착륙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들은 착륙을 원하지 않는 사람과 같은 국민이니 착륙을 허락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위험한 비행기의 착륙을 불허하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나 그런 결정에는 아픈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없었습니다. 바이러스 치료에 동참했던 사람이 치료제에 의해서 회복되면서 비행기는 무사히 한국공항으로 착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염되었던 사람들은 건강을 회복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모처럼 동창모임을 하던 중에 한 명이 몸 상태가 이상해서 코로나 테스트를 했는데 양성이 나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즉시 몸 상태를 공개했고, 스스로 격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신부님 방 앞에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같이 여행을 다녔습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은 약을 처방 받아 왔습니다. 혹시 몰라서 약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같이 다니면서 목이 따끔하면 처방받은 약을 함께 먹었습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은 가벼운 증상으로 곧 치유되었고 테스트 결과 음성이 나왔습니다. 본인은 혼자서 남겠다고 했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데 마스크를 착용하고 함께 다니자고 했습니다. 증상도 별로 없으니 그리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치료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안심하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확진자와 같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위험할 수 있지만 같이 다니는 것은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동료에 대한 우정입니다. 이젠 ‘With Corona’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공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치료제가 있다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창 모임을 잘 마치고 각자의 임지로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던 아버지에게 큰 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내는 이유도 이야기 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인의 지혜로는 이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의 율법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나의 것은 이미 다 너의 것이 아니냐? 너는 이미 나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 왔으니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마음으로, 공감의 마음으로 돌아온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삶의 중심은 이성과 자본입니다. 그 이성과 자본은 현대문명이라는 바벨탑을 만들었습니다. 화려하고,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자비와 공감이 없는 현대문명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벨탑을 무너트렸던 것처럼 우리가 자비와 공감을 회복하지 못하면 우리가 힘들게 쌓아온 현대문명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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