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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1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9-20 조회수720 추천수3 반대(0) 신고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마태오 복음서 입문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일치 권고

4-6장은 서간의 제2부로서 권고 부분이다.

이 편지의 권고는 일치의 호소로 시작하는데, 이는 교회를 위협하는 불일치의 이단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1

그래서”: 여기서 시작되는 권면들은 앞의 1-3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건에 근거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권고합니다로 번역된 파라칼레은은 바오로 서간들에서 공동체에 대한 권고의 특수용어처럼 되었는데 권고하다이에도 간청하다또는 위로하다의 의미가 있다.

 

권고 부분의 첫 명령문인 이 문장은 이어 나오는 많은 권고의 근본을 표현한다. 하느님이 신앙인들을 불러 복음과 만나게 하셨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말은 사족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강조한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저자의 소명에 합당하게 미래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살아가다로 번역된 페리파테인은 본디 거닐다. 선택하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로서 2,1-10이 보여주듯이 삶의 온 영역을 포괄한다.

 

2

골로 3,12-13; 갈라 5,22-23; 필립 2.3에도 나오는 덕목들 참조. 겸손과 온유와 인내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없어서는 안될 덕목이다. 이 모든 덕목의 바탕은 사랑이다. 사랑의 결핍이야말로 공동체의 일치를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이다. 겸손은 대표적인 성서적 덕목이다.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겸손이란 노예나 하는 비굴한 태도로서 추구할 만한 덕목이 아니었다. 온유에 관해서는 마태 11.29;2고린 10.1;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 관해서는 1고13.4 참조.

 

3

2.14에 따르면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다. 골로 3.14에 의하면 사랑은 완덕의 끈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평화는 교회 안에서 일치로 나타난다.

 

유지하도록 힘쓰시오로 보아, 공동체의 일치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 안의 일치는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이 선물의 보존을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4

4-6절의 짧은 글 안에 하나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오면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한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에서 교회일치에 관한 가장 명백하고 강한 호소다.

첫머리의 몸도 하나라는 표현에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교회의 일치란 오직 그리스도를 근거로 할때만 의미있고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

 

희망으로가 아니라 희망 안에서. 부르심과 함께 하나인 희망이 주어졌다.

 

5

주님도 한 분,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라는 3중개념은 원문에서 하나를 뜻하는 낱말이 남성, 여성, 중성으로 변화하면서 표현되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주님도 한 분이라는 고백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네가 믿는 주님을 주변세계 사람들이 경배하던 수많은 주님들과 구별하는 데 사용한 일종의 표어였던 것 같다.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라고 믿음과 세례가 직결되어 있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믿음과 세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세례 때 지망자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고백을 하는데 5절에서 말하는 말씀은 그런 신앙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하나인 믿음은 세례에서 신앙고백으로 표현하고 성령의 날인을 받으며 신앙인들을 새로운 일치로 묶어준다. 주님의 이름으로 베풀어 지는 세례는 신앙인들을 한 분이신 주님 아래 두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준다.

 

6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신약성서 서간들에 일관하여 나온다. 이런 신앙고백은 다신교 환경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여기서 그리스어 디아는 수단적 의미의 통하여보다는 관통하여의 뜻을 더 갖고 있다.

 

6절에 네 번 나오는 모든 이의 그리스어는 문법상 남성복수로도 중성복수로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해석을 둘러싸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일치를 권고하는 문맥에서 보면 일차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지만, ”하나이신 하느님이라는 주제가 구약성서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창조주를 연상시킨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만물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배제할 수는 없다. ”모든 이(만물) 위에, 모든 이(만물)를 통하여 모든 이(만물) 안에계시고 활동하시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야말로 교회 일치의 궁극적 근거다.

 

7

앞에서는 여러분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우리라는 호칭을 다시 수신자들과 결속을 강조한다.

7-16절 단락의 첫 구절과 끝 구절에 나오는 하나하나라는 어구에 유의할 만하다.: ”우리 하나하나에게“(7), ”각각 맡은 분량애돌“(16), 이 표현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도 다양성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11

,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주셨다8절에 인용된 시편의 주셨다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사용된 단어다. 누구에게 주셨는지명시되지 않았지만, 문맥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주셨다고 보아야겠다. 교회 내의 여러 직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무상의 선물로 이해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12

교회 내 직물, 특히 지도직의 목적은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섬기는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에페소서에서 말하는 일치는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일치다. 교회의 일치는 은사와 직분의 다양성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다양성이 교회를 하나로 묶는 평화의 끈까지 끊어서는 안된다. 모든 은사는 아버지께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며, 모두가 교회의 선익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고 또 그 몸의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이 바라시는 완성을 향해 성장하는 데 공헌한다.

 

13

원문에서 이 13절은 도달의 목표점으로서 다음 세가지가 매번 같은 전치사와 함께 연속적으로 언급된다. ”일치“,”완전한 사람“,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완숙한 경지“, 처음의 메크리(”...할 때까지)와 세 번 반복되는 전치사 에이스(“...으로, ...에로”)가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에서 거쳐야 하는 성숙과정이 있음을 말해준다.

 

더러는 이 완전한 사람14절의 어린아이와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단순히 성년에 이른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란 단순히 완숙한경지에 다다른 개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 종합적 의미로 완전한 사람인 새 인간”, 새로 태어난 모든 이의 원형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 완숙이라고 번역된 헬리키아는 본디 나비또는 몸의 크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마태오를 부르고 세관원들과 식사하시다

마태오는 마르 2,13-17을 베끼면서 가감. 수정했는데,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태오로 고친 것. “여러분은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우시오를 덧붙인 것이 돋보인다. 소명사화와 논쟁 상황어는 본디 따로 전해왔는데 마르코가 한데 모았을 것이다.

 

9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열두 제자 명단에 전혀 나오지 않는 까닭에 그 명단에 들어 있는 마태오로 대치시켰다.

 

10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평신도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하여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 땅의 백성, 죄인들이라고 낙인찍어 상종하지 않았다. 우리네 식으로 말하자면 상것들이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세관원들과 죄인들”,“세관원들과 창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세관원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게 마련인데다가 부정 수입으로 치부하는 수가 흔했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들이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다.

 

12

예수님은 상것들과 잘 어울리셨다. 오죽했으면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하는 비방을 들으셨겠는가.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포섭하려고 애썼지만 특히 상것들에게 애정을 쏟으셨다. 당신의 이런 심정을 의사는 성한 사람들보다 앓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격언 같은 말씀. 의인들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에서 토로하셨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런 처신으로 구약성경으로 뒷받침하여 여기서와 12.7에서 호세 6.6을 인용했다(23.23도 참조).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의 영향을 받았던가. 교회 안에서는 유다인과 헬라인, 노예와 자유인,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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