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09-21 조회수817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에페4,1-7.11-1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7)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1-6절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권면과 교회 일치의 근거 및 당위성에 대해 제시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전환의 접속사 '데'(de; but)가 사용된 에페소서 4장 7절 이후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총을 받은 교회 구성원들의 독특성을 말하며, 나아가 그들의 다양한 봉사의 직분으로써 하나된 교회의 일치와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 구성원 각 사람에게 분량에 따라 은총을 주셨음을 밝힌다.

여기서 '은총'으로 번역된 '헤 카리스'(he charis; grace)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죄의 용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도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분'을 가리킨다. 이 봉사의 직분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므로 '은사'(charisma)라고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부르시는데, 각 지체의 개성을 무시한 채 획일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지체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각 은사를 통해(1코린7,7 ; 고유한 은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이 된 교회를 위해 효과적으로 봉사하게 하셨다(로마1,11).

 

에페소서 4장 7절을 새 성경은 능동태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수동태이다. 직역하면 '그러나 이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졌다'(But to each one of us grace was given)이다.

여기서 '은총'('헤 카리스'; he charis; grace)이 주어로 사용된 것은 은총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주어졌다'('에도테'; edothe)라는 수동태로 쓰여진 것은 은사 분배자이신 그리스도의 시혜성(施惠性)을 드러낸다.

또한 이 시제는 부정 과거 시제인데, 이것은 은사의 분배가 이미 이루어졌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인간 편에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테스 도레아스'; tes doreas; of the gift) 양에 따라'

이것은 성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총이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분량에 따라 주어졌음을 말한다. 여기서 '양에 따라'에 해당하는 '카타 토 메트론'(kata to metron)은  '알맞게 측정된 것에 따라서'(according to the measure)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 구성원들인 성도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측정하시고, 그에 적합한 봉사의 직분을 주신다는 것이다 (Christ apportioned it).

따라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이진 은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사람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자신의 은사만을 높여서는 안된다.

 

반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다른 사람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불평하거나 평가 절하해서도 안된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로마8,29) 나에게 가장 알맞은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은사를 자랑하거나 불만삼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로써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교회와 지체를 위해 봉사하면 되는 것이다(에페4,12).

 

 "그분께서는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와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11)

에페소서 4장 7-10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게 저마다 분량대로 은총을 베푸셨음을 말하였다.

이에 이어지는 에페소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은혜의 선물의 분량을 따라 각 지체에게 부여된 각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공통의 목적을 갖는다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에페소서 4장 11절에는 초대 교회 당시 있었던 대표적인 직분들을 나열한다. 먼저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루스'(apostolus)는 원형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복수형이다. '아포스톨로스'는 '사명을 주어 자신의 대리자로 파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apostell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파견된 자'(使者)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칭하였으며(루카6,13)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셨다(마태10,1-8). 그런데 예수님의 사도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마태10,5; 갈라1,1).

둘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이를 증거할 사명을 맡은 사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증인) 이어야 한다(사도1,21.22).

셋째,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자이어야 한다(요한14,26).

 

이러한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에 먼저 부르신 열 두 제자 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좋은 의미로서의 사도는 이들로 제한되고 국한된다.

그런데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목매어 자살한 뒤에, 열한 사도는 그를 대신하여 마티아를 제비뽑아 빈 자리를 보충했다(사도1,15.16). 그리고 그 후에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사도의 대열에 들어섰고(사도14,4; 갈라1,15-17) 주님의 동생이라고 여겨지는 야고보도 사도로 불리워졌다(갈라1,19).

 

다음으로 '예언자', 즉 '프로페타스'(prophetas)의 원형 '프로페테스'(prophetes)는 '~앞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프로'(pro)와 '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페미'(ph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미리 말하는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예언자 하느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며 장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약에서는 이 용어가 개별적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사도'라는 용어와 자주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에페2,20; 3,5; 묵시18,20) 예언자의 역할은 사도의 그것과 유사했으며, 또한 두 직분은 초대 교회를 세우는 양대 기둥의 역할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도의 메시지가 일반적이고 교리적이었다면, 예언자의 메시지는 실질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인도하는 일에서 주도권을 가진 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면,  신약의 예언자는 사도들의 사목을 도와 교회내에서 '덕을 세우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였다(1코린14,3).

신약 시대의 유명한 예언자로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다와 실라스(사도15,32) 등이 있었고, 이러한 예언자의 역할은 A.D. 2세기 경까지 이어졌다.

 

또한 '복음 선포자'는 선교사처럼 복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해당하는 '유앙겔리스타스'(euanggellistas)의 원형 '유앙겔리스테스'(euanggellites)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유앙겔리조'(euanggellizo)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단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는데, 사도행전 21장 8절에는 필립포스에게, 그리고 티모테오 후서 4장 5절에는 티모테오에게 사용되었다.

 

한편, 사도(apostles), 예언자(prophetes), 복음 선포자(euanggelistes)는 원문에서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계속해서 교회 내의 다양한 봉사의 직무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목자'로 번역된 '포이메나스'(poimenas; pastors)의 원형 '포이멘'(poimen)은  본래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양치는 목자', '가축지기'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하셨을 때에도 이 단어가 쓰였다(요한10,11).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포임네'(poimne)가 '양떼'를 의미한다는 것(루카2,8; 1코린9,7)이 '포이멘'이 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자임을 잘 나타낸다.

 

그 다음 '목자'를 바로 이어서 등장하는 '교사'를 가리키는 '디다스칼루스'(didaskalus; teachers)앞에 관사 '투스'(tus)가 없다는 점에서, '목자'와 '교사'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 견해를 따르면 '목자'는 곧 '가르치는 자'(교사)라는 것이다. 코린토 전서 12장 28절에서 사도와 예언자 다음에 교사만 언급하는 점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목자'와 '교사'를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경우에는 '목자'를 감독과 원로로 나뉘어서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보고, '교사'를 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가르쳐 영적으로 인도하는 직분으로 본다.

 

 

 

 

 

 

2022년 09월 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세리 마태오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 레위로 소개됩니다(마르 2,14; 루카 5,27 참조).

주님께서 마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듯이,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주신 듯합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 이름 마티트야에서 온 것으로 주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그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은 정녕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소명과 응답이라는 이 단순한 장면은 그 자체로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카파르나움(마태 9,1; 마르 2,1 참조)의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에 관하여 이미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세리라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과 매국노라는 비난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떳떳하고 기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들어 알고 있던 분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나를 따라라.” 하셨을 때,

지독히도 원망스러운 그 모든 과거를 온전히 용서받고 새 삶으로 초대받은 그 순간에,

마태오가 느꼈을 전율과 환희가 생생히 느껴집니다.

죄와 부덕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열었을 때,

탐욕과 억압의 장소인 세관이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식탁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죄인들을 탓하며 구원의 기쁨에서 스스로 멀어졌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부르심받은 사람답게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면서’(1독서 참조)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살아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