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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2-09-25 조회수842 추천수2 반대(0) 신고

220925. 연중 제 26주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은 연중 26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이번 주일 말씀전례의 주제도 재물의 사용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가진 자들의 흥청거림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요한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위한 싸움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곧 티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의로움과 ~사랑”을 추구하며, “그리스도가 나타날 떼까지 흠 없이 계명을 지키기”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로,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이름은 제시하지 않으나, 거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의 ‘라자로’라고 그 이름을 밝힘으로써, 하느님이 그를 인정하고 도우신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반면에 부자가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난힌 이들과 형제들과 사이에 높은 문턱을 쌓아놓고 살게 되면 저승에다 건널 수 없는 구렁을 파놓는 꼴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른 것이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단지 소유한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쓰는 데는 인색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그에게 무관심했을 뿐입니다. 마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가진 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는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세계적인 거부 석유 왕 록펠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돈을 벌기보다 쓰기가 열 배는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척한 것처럼, 내 곁에 형제가 상처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의 눈이 감겨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아니,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져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에 눈이 가려져버린 까닭일 것입니다.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이승에서 자비를 베풀어야 저승에서 자비를 입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심판 후에는 그 기회가 마감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일’에 있음을 밝혀주십니다. 사실, 당신을 믿지 못함은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도 받아들이지를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혹은 신비를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완고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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