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09-26 조회수1,017 추천수8 반대(0)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사제 모임에서 강사 신부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용서와 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신부님 한 분이 손을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용서와 화해가 둘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함으로써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먹구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용서함으로써 내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70년이 넘게 분단된 상태도 있는 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말다툼 끝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저의 목을 잡고 있었고,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혀서 울었고, 친구는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울던 우리는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저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고, 친구도 기가 풀려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화해는 이렇게 서로가 잡았던 것을 놓아야 시작됩니다. 어제 욥 성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용서함으로써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화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은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의 이치일지 모릅니다. 그래야 사회가 질서가 잡히고, 제대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분노와 심판은 잠시 평화를 줄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하여,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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