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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0-04 조회수1,239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14년의 기간이 어느 시점부터 계산되어야 하는지는 역시 미지수다.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회개 시점부터이고, 다른 하나는 첫 번 예루살렘 방문부터다.

어쨌든 바오로의 예루살렘 방문에 관한 이 대목의 사도행전 자료의 상호관계는 신약에서 가장 어려운 주석학적 문제 중 하나다. 갈라 2장과 사도 15장이 동일한 사건을 전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지만, 분명한 차이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서 4차 키프로스 태생 레위인으로서 이름은 요셉이고, 사도들은 그를 바르나바로 불렀다. 사도 13.1은 안티오키아의 예언자 혹은 교사로 소개한다. 그는 1차 선교여행 동안 바오로의 동료였다.

 

이방계 그리스도인으로서 3차 선교여행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다. 바오로의 고린토 공동체의 관계를 화해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이다.

 

2

어떤 종류의 계시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다마스커스의 계시와는 무관해 보이는데, 어쨌든 예루살렘 사도들의 소집을 받은 것은 아님을 밝힌다.

 

두 사건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예루살렘 공동체 앞에 공개적으로 나섰던 일과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개별적으로 만났던 일. “저명한 인사기둥들인 야고보. 케. 요한을 지칭하는데 표현 자체는 공격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긍정적이라면 모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함을 ,부정적이라면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얕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긍정적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달리다는 성서 언어가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육상경기에서 가져온 것으로서, 바오로 자신의 복음선포 활동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다.

 

7

이렇게 바오로는 베드로와 동등하게 인정받았고, 선교의 장은 그들에 의해 양분되었다. 이는 민족적 구분이라기보다 지정학적 분담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방인의 사도로 불리는 바오로이지만 그는 보통 유다인들의 지역에서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위임받았다는 완료형 수동태로서, 바오로의 소명을 통해 하느님이 복음을 위임하셨고 그것이 현재까지 유효함을 나타낸다.

 

9

유비적 의미로 기둥이란 고대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던 표현으로서, 초대교회에서는 아브라함.이사악. 야곱을 이스라엘과 전세계의 세 기둥으로 생각하는 랍비문학에 근거하여 예루살렘 공동체의 세 지도자를 선정한 데 기인했을 것이다. 어쨌든 기둥이라는 개념은 메시아 세대에 세 지도적 인물이 이끌어 가는 종말론적 공동체로 보는 생각과 연결된다.

 

저명한 인사들”.“저명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름이 처음으로 밝혀진다. 흥미로운 것은 야고보가 케파나 요한보다 먼저 언급된 점인데, 사도들 중에는 베드로가 우선권을 갖고 있었지만 행정이나 정책에서는 예루살렘의 주교로 알려진 야고보의 영향력이 컸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이 친교의 악수로써 바오로의 복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들의 동등한 업무 분담 상대로 삼게 되었다.

 

10

사도회의 결과 위에 언급된 동의 외에 바오로에게 새롭게 부과된 것은 오직 하나였는데, 그것도 문제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이란 아마도 예루살렘 성도들 중 가난한 이들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소위 아나윔이라고 불리는 경건한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가능한 또 다른 번역은 그것은 내가 열렬히 하려 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혹은그것은 내가 언제나 열렬히 했던 바로 그 일입니다”. “열렬히 하다의 시제가 부정과거인 것을 어떻게 이해할지. 그리고 앞 문장에서 1인칭 복수였던 주어가 1인칭 단수로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 문제가 되는 구절이다. 주어가 복수에서 단수로 변한 이유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이 편지를 쓰는 사인데 바르나바가 바오로와 헤어져 모금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은 바오로가 2.1-3,6-9ㄱ에서 바르나바와 함께 있었음에도 주어를 1인칭 단수로 쓴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특별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동산의 시제는 그 때부터 일을 시작한다기보다 이미 해온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1

예루살렘 밖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큰 공동체를 이룬곳이 안티오키아였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해 안티오키아로 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 다음 이방인들에게 선포했다. 바오로는 이곳을 선교여행 기지로 삼았다.

 

아마도 바오로와 케파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정 후에 잠시 안티오키아에 들렀을 것이다.

 

직역하면 그는 단죄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베드로의 처신에 대한 바오로의 판단은 매우 준엄하다. “단죄된 상태에 있다라는 동사는 수동태로서 단죄하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2

베드로가 하느님 앞에 단죄된 상태인지에 대한 이유를 이끌어내는 접속사이다.

 

이들이 4절의 거짓 형제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해결된 할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음식에 관련된 유다교 율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관한 규정은 사도회의에 상정되지도 않았었다.

 

유다인 음식규정에 의하면 이방인과 회식을 해서는 안되는데, 이방인 음식이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그 음식을 우상에게 바친 것이나 부정한 짐승의 고기 혹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나 그밖에 율법규정에 저촉되는 방법으로 요리한것이라고 여겼다. 게파는 이방인이 주민의 대다수인 안티도키아에서는 그들의 생황양식을 존중했다. “함께 먹다라는 동상의 시제가 미완료이므로 게파가 습관적으로 이방인들과 식사했음을 암시한다.

 

할례 출신의 사람들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아니면 단순히 할례받은 사람들유다인들을 지칭할 수 있다. 문맥상 단순히 유다인들로 보는 것이 낫다.

 

베드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식탁에 함께 하기를 거절하여,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상을 준다.

 

13

안티오키아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게파의 위선적 처신은 나머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바르나바에게 음식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는 힘을 가진다. 바오로는 그것을 언행의 모순이며 정치적 타협으로 보았기 때문에 공재적으로 케파를 비난했다.

 

1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요는 단순히 할례만이 아니라 음식규정도 포함한 유다교 율법에 해당된다. 바오로가 게파와 그의 동조자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일관되게 처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파의 행동이 이미 바르나바와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런 비난을 하지만, 그 비난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가는 다른 문제다. 바오로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에 대한 유효성과 논리를 확립하기 위해 케파에 대한 반대를 적었을 뿐이다. 이 음식 문제는 케파와 바오로가 떠난 뒤에 다시 제기되었고 안티오키아 교회는 야고보에게서 지침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낸다.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주님의 기도

루카는 11.1-13에 기도에 관한 전승들을 모아놓았다. 주님의 기도는 어록에서 따왔고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 비유는 특수사료에서 옮겼으며, 청하면 주신다는 단절어와 아들의 청을 들어주는 아버지 비유는 또다시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마태오에는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계기가 없다. 그런가 하면 루카는 단순히 아버지라 부르는데 마태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고쳤다. 또한 루카에는 다섯 가지 청원기도가 있는데, 마태오는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또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를 덧붙여 일곱 가지 청원기도를 만들었다. 루카에 수록된 다섯 청원기도 가운데 앞의 두 청원기도는 신국 도래를 비는 것이요, 뒤의 세 청원기도는 제자들이 신국 도래를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만을 비는 것이다.

 

1

루카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자주 말한다.

 

2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대화, 따라서 상대를 부르게 마련이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아버지라 하나 실제로 예수님은 아빠라 하셨다.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이름은 정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청원기도는 아버지의 거룩한 정체가 환히 드러나기를 비는 것이다. 지금은 숨어계신 성스러운 하느님이 마침내는 훤히 드러나시기를 비는 종말론적 청원기도다.

 

예수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다. 하느님은 자연계와 인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를 다스리시나, 이는 은밀한 통치요 미완성 통치다. 그러나 종말이 되면 하느님은 드러나게 또한 결정적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여기서는 그 종말론적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빈다. 2절의 두 청도는 유다교 회당 예배를 끝맺을 때 드리던 카다쉬 기도문의 내용과 매우 비슷하다. “당신 뜻대로 지으신 이 세상에서 당신 이름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되소서. 또한 빨리 서두르시어 여러분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이 나날(을 살아가는) 동안, 온 이스라엘 집안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당신 나라를 세우소서.”

 

3

빵을 수식하는 낱말은 매우 희귀할뿐더러 그 뜻이 자못 불분명하다. 그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에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내일을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은 내일대로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그 날 괴로움으로 족합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참작하고, 아울러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루 동안 먹을 만큼의 만나만 매일 아침 거두었다는 고사를 연상한다면 메피우시오스를 일용할이라 의역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마태 6.11에서는 우리가 일용할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라 하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일용할 빵을 날마다 우리에게 주소서라 한다. 루카가 오늘날마다로 고쳤을 것이다.

 

이 청원기도는 몇몇 부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나날을 살아가던 제자들, 아무것도 갖지 않고 전도하려 떠나던 제자들이 온전히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면서 오늘 하루의 음식을 청하는 기도다.

 

4

같은 내용의 청원기도가 마태 6.12에 있는데 낱말과 시제가 약간 다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빚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 호바는 본디 빚을 뜻하지만 죄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사상은 마르 11.25;마태 5,23-24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먼저 하느님의 가이없는 용서를 체험해야만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도량이 생기는 법이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더러 바치게 하신 청원기도이므로, 여기 유혹은 제자임을 포기시키려는 유혹이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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