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6 연중 제27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0-05 조회수656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3,1-5
1 ,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5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율법인가 믿음인가?

3,1-4,31은 교의적 주제를 다루는 부분으로서,2,15-21에서 선언한 주제, 즉 사람은 율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구원된다는 주제를 증명한다. 다섯 개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구성된 3,1-5는 그 첫째 증명으로서 갈라디아인들의 성령경험에 호소한다.

 

1

1.11이래 처음으로 수신인을 이름으로 부른다. “형제들이나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 갈라디아인들이라하니,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비난조다. “어리석음지능이 모자라는”, “미련한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심히 모욕적인 표현은 아니다. 실망과 당혹감을 나타낸다.

 

원문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이라는 분사가 1절 맨 끝에 있는 것은 강조형이며, 완료시제인 것은 골고타에서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가 현재까지 계속됨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나간 시간 속에 유폐된 사건이 아니라 바오로의 선포를 통해 시간상의 거리를 넘어 구원의 힘을 행사한다.

 

마치 모세가 구리 뱀을 보여주었듯이 바오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지금 갈라디아인들 눈앞에 나타나 계신 것처럼 실감나게 선포한다.

 

흐리다라는 동사는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데, 그리스 세계에서는 플라톤 이후로 흔히 쓰였다. 갈라디아인들이 실제로 어떤 마술에 걸려 미혹되었다기보다는 당시에 적대자들과 그들의 전술을 지칭하기 위해 마음을 혼란시키다라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2

갈라디아인들의 회개경험에 호소한다. 그들이 바오로의 복음선포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성령을 받았다면 더 이상 논쟁이 필요없겠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그것을 자신이 말하기보다 그들에게서 직접 듣고 싶어한다.

 

직역하면 여러분은 영을 율법의 행실로써 혹은 믿음의 들음으로써 받았습니까?”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은 하느님 호의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영원한 구속의 명백한 보증이다. 바오로는 그 성령의 선물이 어떤 토대, 어떤 기원에서 온 것인지를 묻는다. “율법의 행실믿음의 들음과 대조된다. 영의 체험은 율법을 지키는 인간적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써 받는 무상의 선물이다.

 

3

1절에 이어 다시 독자들을 질책한다. 형태상 의문문이지만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 “시작하다끝마치다가 대조를 이룬다. “믿음의 들음과 연결되듯이 율법의 행위와 연결되는 것 같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곧 육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것임을 암시한다. 또 다른 해석은 여기서 이란 할례, 즉 육체에 행해진 표지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었는데도 할례 때문에 그 선물을 포기할 수 있느냐는 냉소적 질문이다. 어쨌든 여기서 바오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인즉 그리스도교적 삶은 오직 성령의 활동에 의지함으로써 시작되고 유지되며 절정에 달한다는 것이다.

 

4

그렇게 많은 것이란 영의 체험과 이에 결부된 기적적 체험을 가리킨다. “체험하다라는 동사는 고통받다라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서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생략구문이라서 번역에 어려움이 있다. 직역하면 정말 허사였다면인데, “정말 헛일이었습니까?”로 이해한다면 갈라디아인들이 새로운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바오로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참으로 헛되었습니다라고 이해한다면 바오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느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5

여기서 기적과 영을 베푸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기적들이 성령과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곳에서 기적들은 성령께로부터 온다.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5

5-7절의 비유는 루카복음에만 있는데 그 본래의 뜻이 변절되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비유란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려고 빵 세 개를 청하는 친구를 좀 성가시다 해서 물리치다가 너무나 귀찮게 구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 청을 들어주었다 한, 근동인들이 우정과 손님접대를 중히 여긴 사실로 미루어 매우 부자연스럽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로 시작하는 비유는 으레
... 하겠습니까?” 또는 ”... 하지 않겠습니까?”로 끝맺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 7절만은 의문문 대신 서술문으로 끝맺는다.

 

8

예수께서 할 것입니다대신 하겠습니까?”로 비유를 끝맺었을 것이요, 청중은 강력히 부인하여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 했을 것이다. 정말 우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난처한 처지에 있는 친구의 청을 즉시 들어주겠지요라고 답했을 것이다. 이제 비유의 본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곤경에 처한 친구의 청을 들어줄 줄 안다면 하물며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곤경에 처한 자녀들의 청을 안 들어주실 리 만무하다! 사악한 인간과 선하신 하느님을 비교하는 대비논법이 함축으로 들어 있다 11.11-13(마태 7,9-11); 18,2-7ㄱ의 대비논법을 참조하라.

 

8절은 루카가 전한 전승자 또는 루카복음 저자 자신이 만들어 덧붙인 것이다.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재판관 비유의 영향을 받아 8절을 지어넣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결과, 하느님은 곤경에 처한 인간의 청원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탈바꿈했다.

 

9

9-10절은 하느님이 청원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단절어. 같은 단절어가 마태 7,7-8에도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이는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11

11-13절의 변체가 마태 7,9-11에도 수록된 것으로 미루어 이 비유 역시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그런데 마태오의 형태가 어록을 충실히 반영하는 까닭에 그를 소개하고 풀이하겠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그에게 돌을 주겠습니까? 또는 생선을 청하는데 그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사실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풀이하건데, 예수께서는 하느님 한 분만이 선하

 

시고 인간은 악하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대비논법을 구사하여,악한 인간이 제 자식들의 청을 들어준다면 선하신 하느님은 자녀들의 청원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다. 루카의 개작을 지적하면 .“ 빵을 청하는데 그에게 돌을 주겠습니까?”로 고쳤고,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로 고쳤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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