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7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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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06 | 조회수85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은 영토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찔렀다. 비오 5세 교황은, 이 전투의 대승이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나중에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1독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주해 7절 7절은 6절의 결론이지만,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하다. 아브라함의 예를 든 다음에 갈라디아인들도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의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갑자기 “아브라함의 자손”을 들먹인다. 아마도 할례나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바오로는 그들의 용어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여, 할례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반박한다. 8절 “예견하다”는 유다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성서의 의인화로서, 그 기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바오로는 이 의인화를 사용하여 신앙을 통한 의화도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 계획에 속함을 일깨운다. 창세 18.18 혹은 창세 12.3을 암시한다. 창세기에서 야훼의 약속은 자손 번성과 가나안 소유에 관련된 것이 있다. 본문에 대한 유다교의 일반적 이해를 생각해서 바오로는 “축복을 받으리라”는 동사를 수동태로 쓰는데, 이는 하느님이 모든 복의 기원이심을 암시한다. 당시에 이방인들도 야훼를 섬기고 할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논제를 바꿔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축복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9절 유다교에서 아브라함에게 즐겨 붙이는 수식어 “충실한” 혹은 “신앙 깊은”이란 단어를 바오로는 임의로 사용한다. 아브라함처럼 “믿는” 사람은 그의 자손이며 그래서 그에게 약속된 축복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8-9절에서는 모든 이방인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음 받는다는 말과 그들이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동일시한다. 창세기 12.3에서 약속된 복은 본래 물질적 번영을 뜻했다. 그러나 바오로는 아브라함도 하느님을 믿었고 그래서 의로움을 인정받았다는 창세 15.6에 착안하여 하느님의 물질적 축복을 “의화”로 해석한다. 하느님은 그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믿음을 통해 모든 이방인과도 의로운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그에게 내리신 복을 이방인들에게도 베푸신다는 것이다. 10절 바오로가 보기에 율법은 아브라함의 축복을 전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강요함으로써 저주를 내린다. 이 의무는 인간 내면에 부과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어디서도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신명 27.26을 인용하는데, 그 본래 의미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저주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역설적으로 이 인용을 통해 율법의 행위를 추구하는 자들을 저주로 위협한다. 11절 율법의 준수와 의화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논증하기 위에 하바 2,4를 인용한다. 이 구절은 구약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신앙이 필요함을 말하는 몇 안되는 구절 중 하나다. 본래 문맥에서 신앙에 대조되는 것은 구절 중 하나다. 본래 문맥에서 신앙에 대조되는 것은 율법의 행상들이 아니라 악인들의 교만과 자만심이다. 바오로는 하바2.4의 “믿음”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올바른 사람을 위한 생명은 신앙에서 오는 것이지 율법준수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12절 율법의 원칙은 그 규정의 전반적 준수다. 바오로는 여기서 레위 8.5(“누구든지 그것을 실천하면 살리라”)를 인용하는데, 비록 레위기의 본문은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생명이 주어지리라고 가르치고 다른 문맥에서 바오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기서 그의 의도는 “그것들을 통하여”라는 구절에 집중되어 있어 율법의 행위들이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주장한다. 이렇게 율법준행이 생명을 준다는 레위기의 본문을 그 반대 뜻으로 인용한 것은 이상한데, 아마 이 본문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비추어 해석한 것 같다. 13절 “저주가 되었다”는 “저주를 받았다”보다 훨씬 강한 표현이다. 바오로는 “저주”의 의미를 임으로 전용한다. 즉,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에게 내리는 저주에서 나무에 달린 자에게 내리는 율법상의 특별한 저주로 옮겨간다. 후자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전시된 서신에 대한 저주였다. 그 시선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서 이스라엘 땅을 더럽힌다고 여겨졌다. 로마시대에 자주 사용되던 십자가형에도 구약의 이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초대교회에서도 십자가형을 나무에 “매달리는 것”으로 생각했고, 바오로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가 되셨다”고 말하는 이면에도 이러한 사상이 깔려있다. 바오로는 신명 21.23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에 의해”를 생략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암시를 제거한다. 이 절은 2,19-20과 연계해서 이해 한다. 즉, 그리스도는 “율법을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를 위해, 우리 때문에, 우리 대신 저주가 되셨다. 그것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한 사랑의 행위다. 이렇게 율법이 저주로 처형된 그리스도는 부활함으로써 율법의 저주, 죄의 힘 자체를 파괴하셨다. 14절 이 절에서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가진 두 목적을 명시한다. 즉,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도록 하는 것과 영의 약속을 받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문장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다. 즉,성령의 선물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이다. “영의 약속”은 “약속된 영”을 지칭한다. 근본적으로 믿음은 성령 활동의 열매이며, 동시에 하느님이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 이들에게 영의 선물을 주시는 방도다. 복음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주해 15절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적수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일어난다. 논쟁의 원형이 15,17ㄱ,19절에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는 귀신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여러분의 자식들은 누구 힘을 빌려 쫓아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로 그들이 여러분의 심판관이 될 것입니다.’” 논쟁을 이렇게 재구성하면 그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다. 다만, 베엘제불은 귀신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데, 어록작가가 그를 귀신들의 두목이라고 한 것만은 사리에 어긋난다. 사실 귀신들의 두목은 사탄인 것이다(18절). 16절 16절은 29-32; 마르 8.11을 참고하여 덧붙인 가필. 17절 17ㄴ-18ㄱ절의 변체가 마르 3,23-28에 전해오는데 거기서는 국가 분열과 가정 분열을 따로 열거한다. 그러나 루카는 국가 분열의 결과로 가정이 파괴된다고 고쳤다. 18절 18ㄴ절은 15절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20절 20절은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단절어. “하느님의 손가락”은 하느님의 능력을 뜻한다. 그 옛날 모세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이집트에서 기적들을 행했듯이, 이제 예수님도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신다. 이로써 귀신들의 통치가 끝장나고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된다.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말씀으로 같은 뜻을 피력하신 적이 있다. 20절의 병행문 마태 12.28에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대신 “하느님의 영으로”라 한다. 21절 21-22절 역시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상징어, 상징의 변체가 마르 3.27에 수록되어 있다. 마르코에서는 힘센 가장이 자기 집을 지키는 일을, 루카에서는 무장한 군주가 자기 궁전을 지키는 일을 가정한다. 23절 23절 역시 본디 단절어로서, 예수님을 신봉하는 교회에 속할 것, 목자가 양떼를 모으듯 이스라엘 백성을 교회로 모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교회 소속감과 전도 열성을 강조하는 이 배타적 교회관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한 것입니다”라는 저 포용적 교회관과는 사뭇 다르다. 악령 재침 경고 11.24-26은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예수님의 구마이적으로 악령에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악령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것 같다. 24-26절은 이런 일을 경고하신 말씀이리라. 24절 악령은 사막에 거처한다는 속담이 있었다(레위 16.10 참조). 26절 “일곱”은 꽉 찬 숫자(8.2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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