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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마지막 심판 때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으려면?
작성자김글로리아7 쪽지 캡슐 작성일2022-10-16 조회수762 추천수3 반대(0) 신고

 

 

 

 

 

 

 

 

 

 

 

 

 

2022년 다해 연중 제29주일

 

 

 

 

<마지막 심판 때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으려면?>

 

 

 

 

복음: 루카 18,1-8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다큐멘터리 작가 박지현의 "참 괜찮은 태도"에서 소개된 사연입니다. 

2008년 청주 여자교도소로 촬영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교도관이 말했습니다. 딱 한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고.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녀는 어느 날 남편이 외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륜상대자는 바로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자수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온 그녀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통했고 몇 년 후 가석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첫 날 그녀는 남편의 외도 상대였던 친구를 죽이고 다시 자수했습니다. 

 

 

    문득 그녀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한참 후인 2020년 장동익을 인터뷰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는 부산 낙동강 변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22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은 1990년 1월 부산 낙동강 근처에서 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특진에 눈이 먼 경찰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용의자로 추정해 무자비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을 받아냅니다. 두 명은 사건 당일 현장에 없었지만 계속되는 고문과 폭행을 견디다 못 해 허위자백을 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복역하던 중에 모범수로 감형되어 21년 5개월을 살고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 뒤늦게 사건이 주목받으며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문으로 범인이 조작되었다고 인정했고 부산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열렸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장동익입니다. 

 

 

    살인 누명을 쓰고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어린 딸은 어느덧 커서 어른이 되었고 멋진 아빠가 되기를 꿈꾸었던 서른셋의 그는 어느덧 50세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가 무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했다는 그는 재심이 결정되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용서해야겠다.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놓아야겠다.'

    박 작가가 처음 그를 봤을 때 몇 분동안 말을 잇지 못했던 것은 그의 평온한 표정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억울하다고 내 과거를 망가뜨린 사람을 원망해봐야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않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괴롭힌 사람을 위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짓에 면죄부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장동익의 말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어 봐야 나 자신이 힘드니까 나를 위해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박지현 작가가 처음 만났던 남편과 친구를 살해한 여성은 자신이 심판관이었습니다. 자신이 심판관이 되면 판사는 의미 없어집니다.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 때 그 사람을 역시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장동익 씨는 심판을 심판관에게 넘겼습니다. 심판관이 그의 피해를 다 보상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심판관의 지휘에 서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도 판사와 하늘이 올바른 심판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가 끊임없이 올바르게 판결해달라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치지 않고 청하면 불의한 재판관도 올바르게 판결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칫 믿음이 어떤 것을 들어줄 때까지 청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믿음이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은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심판'에 관한 내용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에는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과 같은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꾸준히 청하면 믿음이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의 심판을 심판관에게 맡겨야만 믿음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이미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 심판해 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의미 없는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세리는 자기 심판을 주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는 사람은 세리가 되는 것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강형욱 조련사가 역대급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반려견끼리 싸우는데 보고만 있는 보호자가 있었기때문입니다. 보호자는 개들끼리 싸워서 서열을 정리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들끼리 서로 판사가 되라는 의미이고 이는 자기가 판사의 권위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개가 주인 앞에서 서로 싸우면 주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면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음을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될때 종말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18,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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