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 월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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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16 | 조회수44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이냐시오 성인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그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역이었던 안티오키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110년 무렵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이냐시오 주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초대 교회의 신앙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해 2절 직역하면 “이 세상 세기에 따라”,보통 “세기” 또는 “세상”으로 번역되는 아이온이 여기서는 바로 다음 표현들이 보여주듯이 의인화한 듯하다. 하느님에 대해 적대적인 세상의 모든 경향이 드러나는 초인간적 세력을 지칭하며 공간적인 동시에 시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영지주의에서 이 단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배경에서 프랑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세상의 신을 따라”라고 번역한다. 직역하면 “공중의 권세의 지배자”, 고대인은 공중이 육지에서 달까지 뻗어 있다고 여겼다. 여기서는 이 공간이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적대세력들의 지배영역으로 표상되어 있다. 3절 죄중에 살던 삶에 대한 이 묘사는 “육의 욕망들”이 죽음의 결과를 낳는 죄스런 행업들로 이끈다는 바오로의 말을 상기시킨다. “본성적으로 진노의 자식들”은 원죄론에 많은 영향을 준 표현이다. 특히 “본성적으로”라고 번역된 퓌에시가 “출생을 통해”라는 뜻으로 해석되면서 원죄론과 결부되었다. 그러나 문맥상 이 말은 “은총으로”에 대조되며, 하느님의 진노는 개인적 죄의 결과다. 위의 어구는 “죄중에 살았기에 하느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지혜 13.1은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상숭배자를 “본성적으로 어리석다”고 한다. 그리스 교부들은 취세이를 “참으로, 실제로”의 뜻으로 알아들었다. 4절 로마 8.35.39 참조. 5절 5-6절에는 이른바 실현된 종말론이 언급된다. 5절 끝의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에서 동사가 현재완료 시제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어에서 현재완료형 시제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어에서 현재완료형은 과거에 실현된 사건의 효과가 지금도 미치고 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6절의 동사는 단순과거형이다. 즉,5-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구원과 부활과 천상 현양은 “그리스도와 함께”,“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현실이다. 그들은 지금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상 영광에 동참하고 있다. 이 실현된 종말론은 골로 2.12에도 있다. 그러나 로마 6,3-11; 8.11.17-18 등에 의하면 에페2,5-6;골로 2.12의 내용은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 일부 중요 사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에 감탄한다. 이 표현은 8절에도 반복되며, 7절에서도 “은총의 풍요함”에 대해 많다. 8절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와 “하느님의 선물” 그리고 9절의 “행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는 모두 구원의 은총적 성격을 강조하는 5절의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를 보완설명하는 표현이다. 6절 “하늘에 함께 앉히셨습니다”: 1.20; 2.6에 의하면 교회는 이미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 위에 하늘 높이 앉아 있는 셈이다. 9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강조하는 이곳의 문맥을 로마 3,24-26과 비교해 보라. 10절 “선행들”: 바오로 친서들에서는 “선행”을 복수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우리”: 내용상 바오로가 :새 피조물“이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주해 상속 시비 12,13-14는 상황묘사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나는 까닭에 상황어 양식에 속한다. 원칙적으로 율사가 민사소송의 판결을 내리는 법이지만 율사가 없을 때는 율법에 밝은 사람이면 누구나 시비를 가려 줄수 있었다. 예수님도 이런 분으로 통하셨기에 상속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는 부탁을 받으셨지만 한 마디로 물리치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는 일에 주력하실 뿐, 경제 문제에 개입할 뜻이 추호도 없으셨던 것이다. 15절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는 루카의 전형적인 연결문이다. 따라서 루카는 따로 전해오던 단절어를 이 자리에 배치했다 하겠다. 마르 8,36-37에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이 단절어는 예수님의 발설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초대교회에서 자주 재물에 대한 “탐욕”을 경고한 사실로 미루어 초대교회의 창작일 가능성도 있다. 어리석은 부자 예화 12,16-20 역시 루카 특수자료다. 루카는 이를 “비유”라 하나, 실은 비유가 아니고 예화다. 비유인 경우에는 이야기의 뜻을 애써 찾아야겠지만, 예화인 경우에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 이 예화를 읽으면 재력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 부자는 인생을 만끽할 계획을 세우지만 하느님은 그를 비웃으신다는 것을 결로 깨닫게 된다. 루카 특수자료에는 예화가 흔한 편이다. 21절 21절은 루카의 가필. “하느님 앞에 재물을 모으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밝히려면 21절과 내용이 비슷한 구절들을 참작해야 한다. “여러분의 소유를 팔아 자선을 베푸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헤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시오...”(12.33=마태 6,19-20); “... 가진 것을 다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18.22=마르 10.21). 이런 구절들을 참작건데 “하느님 앞에 재물을 모으지 않는 사람”은 가난한 이웃에게 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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