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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 중심의 삶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2-10-17 조회수528 추천수8 반대(0) 신고

하느님 중심의 삶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삶-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나라네.”(시편100,3)

 

오늘은 2세기 순교자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참으로 세상 탐욕으로부터 초연했던 사도교부였고 사도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로마로 압송도중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여전히 감동적입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를 잊어 버리십시오, 내가 이 생명을 얻는데 방해하지 마십시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학교에서 일하던 씩씩하고 상냥했던 관리인 아저씨와의 대화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소박하고 순수한 시골 출신의 아내와 두 어린 자녀를 거느린 가장이었습니다. 

 

“저는 매달 봉급을 타면 우선 쌀과 연탄부터 사둡니다. 그래야 안심이 됩니다.”

 

아주 청빈하고 순수하게 사시다 선종하신 노수사님이 임종전 백사십만원을 아빠스님에게 내놓았을 때 깜짝 놀랐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어떻게 청빈한 수사님이 이렇게 돈을 모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만약을 대비하여 휴가비에서 쓰고 난 돈을 모아뒀다는 것입니다. 쓰던 안쓰던 돈이 있어야 마음 든든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던 돈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노년에 안전을 위한 소유 욕구는 생존의 본능임을 깨닫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연노한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던 어느 자매님 이야기도 잊지 못합니다. 몸이 불편하여 거동이 힘든 시아버지가 궁금하여 문을 열면 지갑의 돈을 꺼내 헤아려 보는 모습을 몇 번이나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보장된 환경중에도 수중에 있는 돈을 확인해야 마음이 안정됐던 것입니다.

 

제 경우도 예전 젊을 때 보다 확연히 달라진 집무실 분위기입니다. 예전에는 냉장고도 없어 먹을 것이 없어도, 수중에 돈이 없어도 전혀 부족함을 못 느꼈는데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집무실에는 늘 먹을 것이 얼마간 마련되어있고 수중에도 얼마간 돈을 지니게 됩니다. 방문하는 분들도 먹을 것을 또 어떤 분들은 필요한데 쓰라 어쩌다 용돈을 주기도 합니다.

 

탐욕과 탐식이 문제이지 돈과 먹을 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젊음도 건강도 사라져 가는데 돈과 먹을 것까지 떨어지면 마음은 저절로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기 마련입니다. 

 

어느 병석에 있던 노령의 수도사제가 병문안한 원장에게 종이와 볼펜을 달라 하시더닌 ‘30만원이 꼭 필요하니 마련해 달라’하셔서 즉시 마련해 드렸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바로 이것이 노년의 인간 현실이요 진실입니다. 경솔하게 노욕老慾과 노추老醜라 판단하는 것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정국이 불안하고 전쟁 위험이 있을 때 생필품 사재는 것 역시 생존 본능 욕구입니다. 

 

그러니 탐욕은 생존 본능이며 안전의 욕구 또한 생존 본능입니다. 탐욕의 뿌리에는 두려움이 있고, 돈도 재산도, 식량도 확보해 둬야 안심이 되기에 저절로 발동되는 소유욕입니다. 불안전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소유하려는 본능입니다. 그리하여 정치도 결국은 경제에로 귀결되고 민생문제가 전부가 됩니다. 문제는 끝없는 탐욕, 눈먼 탐욕입니다. 끝없는 건강에 대한 욕구, 끝없는 돈이나 재물에 대한 욕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무지한 인간의 보편적 전형적 모습입니다. 대부분 무지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예화 앞에는 탐욕을 조심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탐욕과 어리석음, 모두가 무지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가 시공을 초월하여 무지한 우리를 일깨우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탐욕이, 재물이란 우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표현이 소출한 것들을 곳간에 쌓아 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느님 중심이 없어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어리석어 질 때, 저절로 이처럼 땅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느님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시야도 완전히 차단 되어 근시안近視眼에다, 하늘로 열린 창도 없고 옆으로 이웃에 열린 창도 없이 완전히 고립단절된 혼자만의 이기적 삶입니다. 완전히 자기도취의 착각이요 환상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부연 설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바로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인색했던 부자,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꿈을 꾼후 다음날 회개하여 모든 것을 나누었다는 스쿠르지의 일화가 연상됩니다. 오늘 예화의 어리석은 부자도 아마 꿈에서 깨어 났다면 즉시 회개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 나누는 삶으로 전환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목표하는 바, 오늘 독자들인 우리의 회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해야 비로소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체험 없이는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은총의 빛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은 결코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소유의 종이 아니라 소유의 주인이 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이들은 돈을, 재물을 선용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편으로 삼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복음에 대한 답을 바오로 사도가 줍니다. 세상의 풍조에 따라 육의 욕망,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삶에서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무지의 탐욕과 어리석음에 대한 유일한 답은 하느님 중심의 삶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단한 나눔과 자선의 삶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입니다. 

 

기본적 의식주에 대한 욕구는 본능적이며 정상입니다. 문제는 과도한 욕심, 탐욕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눈 먼 욕심, 끝없는 탐욕을 분별하여 절제하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가 부단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향하게 합니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외적 소유의 재산이나 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른다.”(시편100,5).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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