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7 연중 제32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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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06 | 조회수29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주해 1절 “하느님의 종”이란 말은 사도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디모 2.24 참조). 아울러 사도는 종처럼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서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자처했다. “선택된 이들”이란 신도로서의 자의식을 나타낸 말이다. 2절 하느님의 약속은 확고부동하므로 신도들은 “이 생명”에 의심이 없이 희망을 걸 수 있다. 3절 “정하신 때”는 본래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사업이 성취된 시기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교회를 통해 그 사람이 널리 알려지는 시기를 뜻한다. 사목서간에 의하면 복음선포를 위임받은 유일한 사도는 바오로다. 여기서 바오로에 관해 결국 모든 교직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즉, 이들에게 “기탁물”이 맡겨져 있으니, 각자 위탁받은 것에 관해 하느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4절 “참된 아들”, 즉 사도와 디도와의 부자관계는 “공통된 신앙”으로 결합된 관계다. 축복의 말마디는 1디모 1.2; 2디모 1.2와 비슷하나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한다. 5절 디도의 주요 임무는 자격을 논한다. 1디모 3.2.7에도 비슷한 자격문이 있다. “그 자녀들도 신자여야 한다”는 2디모 1,3-5; 3,10-15와 같이 몇 세대 이어진 신도 가정을 전제로 한 말이므로, 바오로 때의 시대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전통이 이미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9절 “말씀”이란 설교의 말씀을 가리키며, 그 말씀이 “가르침에 의거한다”는 것은 사도적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뜻을 것이다. 복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주해 죄의 유혹을 경고하시다(1절~3절) 이 단락 가운데 1ㄱ절과 3ㄱ절은 루카의 가필이다. 사실 “그런데...향하여 말씀하셨다”는 루카의 전형적 문체이다. 또한 “여러분은 경계하시오”역시 루카의 경구다. 1ㄴ-2절은 유혹을 경고하는 단절어인데 그 변체가 마태 18,6-7에 있는 사실로 미루어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또 다른 변체가 마르 9.42에도 전해온다. 한결같이 유혹의 대상을 일컬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 하는데, 이는 본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을 저버리도록 제자들을 유혹하는 짓거리를 강력히 경고하셨던 것이다. 루카와 마태오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를 믿음이 약하거나 지위가 얕은 신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했다. 몇 번이고 용서하라(4절) 17,3ㄴ-4는 회개하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단절어인데, 그 변체가 마태 18,15,21-22에 있는 사실로 미루어 역시 어록에서 옮겨썼을 것이다. 매체로 루카가 어록을 충실히 보존한 반면, 마태오는 많이 손질했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많이 작죄했는간에 회개하기만 하면 무한정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유다교에서는 듣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믿음의 힘(5절~6절) 17,5-6ㄱ은 루카의 가필이다. 사실 루카는 제자들이 예수께 청하거나 질문했다는 말을 덧붙인 습성이 있다. 또한 5절에는 “사도들”과 “더하다” 따위 루카의 애용어가 있는 점에 유의할 것이다. 루카는 평소에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만을 “사도들”로 간주했는데 그는 “사도들”이란 낱말을 두 번은 마르코에서 옮겨썼고 나머지 네 번은 스스로 도입했다. “더하다”동사는 네 복음서를 통틀어 마르 4.24; 마태 6.27.33을 제외하면 오직 루카복음에만 일곱 번 나온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공관복음 가운데 루카 11.39; 17.6; 8.6에만 있다. 믿음은 위력을 발휘한다는 상징어는 어록과 마르 11,22-23에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루카 17.6이 어록을 충실히 반영하며 또한 어록이 마르 11,22-23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잘 보존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뜻을 밝히기란 쉽지 않다. 상징어의 뜻인즉 믿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하찮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믿음이라도 엄청난 힘을 낸다는 말씀에는 이스라엘 특유의 또한 예수님다운 과장법이 들어 있다. 이와는 달리 풀이하는 설이 있으니, 즉 지금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장차 역사의 종말에 엄청난 기적에 비하면 지금의 믿음은 제아무리 큰 믿음이라 할지라도 한낱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금 지닌 믿음의 작음과 종말에 있을 기적의 큼을 대조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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