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코로나 시대에 예언서를 정독하면 신앙에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가 하는 묵상입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11-11 조회수425 추천수0 반대(0) 신고

 

 

호세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고메르를 사랑해야만 하는 예언자였습니다. 고메르는 하느님께서 아내로 받아들여라고 해서 아내로 맞아들인 여자입니다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어째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하시는지 하느님이 호세아 입장에서는 정말 야속할 지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다른 남자를 사랑해 자신에게서 떠난 여인을 사랑해주라고 명령을 하시고 또 그 아내를 돈을 주고 사오라고 하셨습니다.

 

고메르의 모습이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적인 의미는 차치하고서 이 스토리에만 몰입해서 본다면 정말 왜 호세아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해서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들였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자신은 하기 싫은데 하느님의 지엄한 명령이라서 순종했을까아니면 정말 고메르를 아내로 생각할 만큼 사랑했을까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했다는 의미보다도 고메르를 사랑해서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게 될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할 겁니다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다를 수가 있다고 봅니다단순히 하느님 말씀이라는 측면보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있지만 하느님을 사랑해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좀 이해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호세아라고 해서 이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거부하고 싶었을 겁니다.

 

인간적으로는 다른 아내를 받아들이고 싶겠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거라서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려고 했던 거라고 보여집니다그렇게 해서 음란한 여인을 받아들여 살았지만 고메르는 또 다른 남자가 그리워 호세아의 품을 떠나게 되지만 그런 아내를 호세아는 품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은 마치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량해주신 것과 비슷한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아무튼 이 부분만 본다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화가 날 수 있을 상황이지만 그래도 다시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정말 하기 힘든 일입니다근데 이게 가능할 수 있습니다조건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으로써는 할 수 없습니다인간적인 감정을 초월한 사랑을 할 때만이 가능합니다바로 이때는 연민의 정도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자신이 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 다른 남자에게 눈길이 가지 않을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면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처지를 생각하면 비참하겠지만 한편으로써는 그런 아내의 입장을 아내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를 한다면 아내를 용서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이런 생각이 너무 억지 같은 생각일까? 더 정확히 말하면 용서라는 말도 좀 이상합니다

 

만약 나 자신이 호세아의 입장이었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음란한 여인이었더라도 사람은 욕망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서 여인에게 진정으로 이 모든 건 자신의 무능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서 모든 걸 자신을 탓하며 여인의 여러 부정행위를 불문에 붙이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성경 상의 스토리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외간 남자인 정부와 지내는 자신을 잊지 못해 그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오히려 부정한 짓을 저지른 자신을 받아들여주겠다고 하는 남자를 봤을 때 어쩌면 여자의 입장에서 한편으로는 이상하긴 하지만 그 남자가 애처롭다고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만약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왜 나 같은 여자를 찾아왔느냐고래고래 고함을 치면서 나 같은 여자를 잊고 딴 여자 만나서 잘 살아라고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정을 여자라고 생각하고 상상을 하니 그런 말을 하는 입장에서 자신을 잊지 못해서 찾아온 남자에게 그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그게 자신의 본심이 아닐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면 어떨까? 바로 이때 이 남편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지 않을까?

 

죄를 짓고 고해소에 가서 하느님께 죄를 짓지 않겠다고 통회를 한다고는 하지만 또 죄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이 많다는 것은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누구나 이해가 갈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또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을 때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 고해소에서 고백한 죄를 또 짓게 되었을 때 이런 나의 모습에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어 또 용서를 해 주시지만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기에 망정이지 나 같은 인간이면 그런 상황에서 과연 용서를 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해본다면 자신이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 다시 그런 자신에게 자비의 손길을 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런 하느님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마치 예레미아 13장에 17절 말씀 한 구절을 보면 그렇습니다. “너희가 순종하지 않으면 내 영혼은 너희의 오만 때문에 숨어 울며 눈물을 흘리리라.”

 

우리 모두는 지나간 성경의 역사이지만 고메르 여인을 단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호세아 11 8절에서부터 보면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결국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이시라서. 하느님이시라서...... 호세아가 고메르 여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게 바로 고메르를 향한 연민도 있었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마음을 통해, 눈을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메르 여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여인을 잊지 못하는 호세아 마음이 바로 하느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사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옛날 박해받던 시대의 신앙선조들과 비교를 해 보면 과연 나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유례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를 통해 한 신부님께서 가톨릭 신앙인의 현 주소를 대변해 주는 듯한 통계 자료를 들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신앙이 식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지금 신앙의 내실을 더 다지는 신앙인도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를 핑계로 만약 신앙이 식어간다면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고메르 여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혼인관계를 매개로 해서 설명하지만 우리 역시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하느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마치 세상이 정부인 양 세상을 더 사랑해 하느님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 영판 고메르 여인이 하느님께서 지적하시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한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도 부부가 결혼을 해 부부로 인연을 맺어 한평생 살아간다면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오더라도 신뢰와 믿음으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부부의 연을 잘 유지시켜야 하는 게 원칙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만난 인연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우리와 하느님과 관계를 따져본다면 이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겁니다.

 

코로나 영향으로 만약 신앙에 흔들림이 생겼다면 단 하나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건 세상살이라는 주변 환경을 하느님보다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물건이나 형상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시는 신부님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아마도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굳이 예언서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당연할 것입니다.

 

시험을 위해 벼락치기로 예언서를 공부하긴 하지만 이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지만 그중에서 지금과 같은 시대는 특히나 모든 신자들이 예언서가 어렵고 난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언서를 좀 더 공부를 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습니다. 예언서를 깊이 공부를 하게 되면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좀 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도 그렇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 말씀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의 가슴에 내릴 수 있는 경종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언서 하면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징벌 이면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절절히 사랑을 하시는지 그 마음을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인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이왕 하느님을 우리 마음에 아버지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우리는 그에 맞게 일편단심으로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번에 예언서를 공부하면서 새로운 다짐을 해봅니다. 더더욱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성경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