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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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16 | 조회수26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전례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성녀는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이 전쟁으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기도 생활과 자선 활동에 전념하였다. 1231년 스물넷의 이른 나이에 선종한 엘리사벳 성녀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제1독서 <어린양은 살해되시고, 자신의 피로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셨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주해 봉인한 두루마리와 어린양 4장에서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예배와 찬미와 영광, 하늘나라에서 원로들과 생물들이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5장에서는 하느님이 계신 옥좌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4장에서는 창조주 하느님을 강조한다면, 5장에서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5장에 나오는 “어린양의 현시”는 6장 이하에 전개될 내용들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들고 계신 두루마리에 기록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결국 어린양이 개봉함으로써 그 내용이 공개된다. 1절 두루마리 책이 세 상징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 책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한다는 뜻이다. “안팎에는 글이 씌어” 있다. 기록된 것의 완전한 실현을 말한다. “일곱 개의 봉인이 찍혀있다. 아무도 그 내용에 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루마리 속에 담긴 세상의 운명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은 어린양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지지 않을 심오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운명이나 인류 전반에 대한 운명이 담긴 천상 두루마리에 대한 언급은 시편 139.16과 다니 10,21에도 있다. 책의 내용은 봉인이 하나씩 열리면서 밝혀진다. 그러나 일곱째 봉인이 다음 나팔로 이어짐으로써 책의 내용이 일곱째 봉인까지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들며, 묵시록의 끝까지 이끌어 간다. 결국 책의 내용은 묵시록 자체이며, 역사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다. 이 계획은 바로 하느님의 것이며, 이미 형성이 되었고, 아무도 접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글자가 많이 씌어 있는 두루마리를 하느님이 들고 나타나셨다는 것은 에제 2.9의 하느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느님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이러한 계시를 받는 저자는 두루마리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 나중에 봉인 하나씩 떼일 때도 적힌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 그 때마다 일어나는 사건만 이야기한다.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연다는 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린다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계시가 지금 여기서 즉 현시 속에서 실현되어 간다는 것도 함께 뜻한다. 3절 창조계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비록 표현이 조금 다르지만 이미 출애 20.4에도 나온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이것은 하늘과 땅과 땅 속의 물이라는 바빌론의 구분법과 통한다. 나중에 땅만의 물 자리는 지하 왕국으로 대치되었다. 5절 루카 7.13;8.52에 나오는 예수의 표현과 일치한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는 창세 49.9에서 취한 표상으로 이미 구약에서 메시아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다윗의 뿌리”는 이사 11.1에서 유래한 것으로 로마 15.12에서 메시아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구약의 메시아 칭호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 봉인을 떼실 수 있다고 한다. 죽고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신 그 힘으로 봉인을 떼실 수 있다는 것이다. 6절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하는 것은 묵시록의 한 특징이다. 묵시록에는 스물아홉 번이나 나오는 반면, 신약의 다른 데서는 요한 1.29.36; 1베드 1.19; 사도 8.32에만 나온다. 묵시록의 어린양은 요한복음의 어린양과 약간 다르다. 이사 53.7을 연상시키는 “살육당한 것 같았다”라는 표현에 나타나듯이 묵시록의 어린양은 능력과 노여움을 가지고 적대세력에 대항하는 모습이다.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깨끗하고 거룩한 면이 더 강조된다. 그래서 보통 용어가 다르다. 묵시록에서는 아르나온을, 요한복음에서는 암노스를 쓴다. 둘다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묵시록에서는 어린양과 짐승의 싸움이 계속 나오므로 강한 인상을 주는 용어를 선택했다. 부활의 영광을 차지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사 53장에 나오는 야훼의 종처럼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고난과 죽임을 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구약성서 후기 유다문학 전승에 따라 충만한 힘과 왕의 위엄을 상징한다. 즉, 메시아적인 힘을 말한다. 저자가 설명하듯이 세상에 보내진 하느님의 일곱 영으로 성령의 활동을 총칭한다. 즉, “일곱 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충만한 지식을 상징한다. 8절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다. 시편에서도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 같게 하옵소서”라고 표현한다. 8.3에서 이 향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9절 구약성서,특히 시편에서 “새로운 노래”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베푸신 “새로운”호의에 대한 감사가다. “새로운” 시대에는 호의에 대한 감사가다. “새로운” 시대에는 이 찬가가 더욱 넘쳐흐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인 새로운 창조는 마음으로부터 기쁨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새로움”이야말로 묵시록 저자에게 귀중한 주제다. 계약의 피로 사람들을 얻어 하느님과 결합하게 하고 그분 생명에 참여케 하셨다는 말이다. 10절 출애 19.6 참조.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주해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며 우시다 19,41-44는 루카에만 있는 상황어다. 우선 앞의 문맥에 따라 41-44절를 풀이해 보자. 예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으로”,“예루살렘을 찾아오신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배척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깡그리 파멸되고 말 것이다. 이 41-44절과 매우 비슷한 사상이 여러 곳에 나온다; 어록, 마르코복음-루카 특수자료, 아마도 루카는 한편으로 위의 사료들을 참작하고 또 한편으로 70년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전해듣고서 41-44절을 엮었을 것이다. 43절 “평화를 위한 방편”은 신약성서를 통틀어 루카 14.32;19,42에만 있는 표현. 44절 43-44ㄱ절은 로마 군인들이 70년 예루살렘을 공략한 사실을 전하는데,루카는 21,20-24에서 그 사실을 더욱 더 분명히 기술한다. “찾아온 때”를 직역하면 “방문의 때”인데, 문맥상 예수 입성으로 하느님이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는 현재를 뜻한다. 하느님은 심판하러 방문하실 수도 있고 구원하러 방문하실 수도 있다. 구원하러 방문하시는 경우 명사 용법도 있고(19.44. 1베드 2.12)동사 용법도 있다(1.68.78; 7.16; 사도 15.8).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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