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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2-11-18 조회수777 추천수9 반대(0)

퀸즈에 있는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였습니다. 신부님과는 지난 3년간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당연히 모친을 위한 연도에 함께 했습니다. 연도는 부제님이 말씀의 전례를 주례하였고, 고인의 큰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인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단 앞에 모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인사하면서 마쳤습니다. 오늘은 유족께서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나눈 일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인은 103살 이었습니다. 1919년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는 불교를 믿다가 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당시 미국에는 사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큰 딸의 권유로 성당으로 왔습니다. 할머니가 성당으로 오면서 자녀들도 모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와서도 제단 앞으로 와서 불교식으로 엎드려서 큰 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니 딸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하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절하면 안 받아 주신다니? 성경에 보니 엎드려 절하나이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자 딸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도 제단 앞에 와서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든지 성당에 오면 제단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엄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혼하지 마세요. 마음 바꾸지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마음 바꾸지 마세요. 계속 한 길을 가세요.”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신학생인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어머니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고,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신앙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 백인대장은 신앙이 없었지만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하를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향해서 일찍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강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부유함과 지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척도는 아닙니다. 갈망과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알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알과 병아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더 이상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실에서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부활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갈 수 있다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다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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