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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묵시19:1-6)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11-23 조회수334 추천수0 반대(0) 신고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묵시19:1-6)

이런 일이 있은 뒤에 큰 군중이 우렁차게 외치는 듯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 왔습니다. '할렐루야구원과 영광과 권세가 우리 하느님의 것이다. 2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공정하시다음란으로 세상을 망친 그 엄청난 탕녀를 심판하셨다당신의 종들의 피를 흘리게 한 그 여자에게 벌을 내리셨다.' 3 그들은 다시, '할렐루야그 여자를 태우는 불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하고 외쳤습니다. 4 그러자 스물 네 원로와 네 생물이 옥좌에 앉으신 하느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아멘할렐루야!' 하고 화답하였습니다. 5 그 때 그 옥좌로부터 이와 같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종들그리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우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6 또 나는 큰 군중의 소리와도 같고 큰 물소리와도 같고 요란한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이제 19장으로 넘어왔습니다

보다시피 19장의 시작이 또 이런 일이 있은 뒤에메타 타우타로 시작이 됩니다이제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는 환상에서 다른 환상으로 전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메타 타우타는 시간 적인 순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7장과 18장에서는 탕녀 바벨론의 처참한 최후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는 반면에 19장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장면인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바벨론이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무너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할렐루야 찬양이 울려 퍼지고 있음을 17,18장과 19장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구조는 독자를 향한 사도 요한의 세심한 배려입니다그러한 극명한 흑과 백의 대조는 우리 성도들에게 더욱 더 큰 힘과 격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묵시록을 잘 보면 요한이 고난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이 요한묵시록을 얼마나 과학적이며 조직적으로 섬세하게 기록 했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요한이 이 묵시록을 얼마나 과학적이며 조직적으로 썼는지는 요한이 하느님에 대한 찬양에 쓰는 용어들만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요한은 하느님에 대한 찬양을 묘사할 때 늘 삼위 하느님의 숫자인 3과 안식의 숫자인 완전수 7에 맞추어서 기록을 합니다.

 

(묵시4:9-11) 9 옥좌에 앉으시고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에게 그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리고 있을 때 10 스물 네 원로는 옥좌에 앉아 계신 그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에게 경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벗어서 옥좌 앞에 내놓으며, 11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하느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리실 만한 분이십니다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존재합니다하고 찬양했습니다.

 

(묵시5:12.7:12 ) 12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2 '아멘우리 하느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찬양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세력을 누리시기를 빕니다아멘하고 외쳤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느님께 있다.’ 라고 삼중 적인 용어를 써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19장 전체에서도 세 번의 할렐루야 찬양이 등장합니다.할렐루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훼를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는 1절과 2절에 나와 있는 군중들의 찬양입니다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두 번째 찬양이 4절과 5절에 나와 있는 하느님의 통치에 관한 찬양입니다그리고 세 번째가 6절 이후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관한 찬양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하느님의 통치와 세 번째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관한 찬양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첫 번째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찬양에 관해서는 조금 자세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문3절에서 보신 것처럼 그 심판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간다고 표현을 할 정도로 그 심판은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묵시19:3) 3 그들은 다시, '할렐루야그 여자를 태우는 불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 간다하고 외쳤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에서 인용이 된 구절입니다.

(이사34:9-10) 9 에돔의 모든 개울은 역청이 되어 흐르고 에돔의 모든 먼지는 유황이 되며 그 땅은 타오르는 역청 바다가 된다. 10 밤에도 낮에도 꺼지지 않아 그 연기는 끝없이 치솟는다영원히 잿더미로 남아 아무도 그리로 지나가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대적(對敵)인 에돔의 멸망에 관한 구절입니다세상의 악은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찬양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어떻게 하느님의 통치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연결이 되는지를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올바른 찬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은 사랑의 발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고린13:4-6) 4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사랑은 친절합니다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고린토 전서 13장 사랑장입니다. 6절을 보면 사랑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습니까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 안에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불의에 대한 심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순결한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심판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느님의 악에 대한 심판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고소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지고함을 깨닫고 할렐루야 찬송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불의에 대한 심판이 우리 각자의 인생 속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악과 불의의 잔재들을 떨어버리는 작업이 지금 우리 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의와 악을 하느님은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으십니다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 입니다.

 아까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요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불의와 악을 매일 매일 심판하셔서 죽여 가십니다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때때로 고단한 것입니다여러분그럴 때 정말 하느님을 찬양하실 수 있으세요?

하느님께서 나의 속에 있는 불의함과 악한 것들을 잘라내시느라 때때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삶 속에 일어납니다그 때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느님을 찬송하실 수 있나요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실제로 그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그들이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그 상황을 기뻐할 수 있었는지를 배우면 우리도 그게 가능해 지겠지요.

 

(필리1:15-20) 15 어떤 사람들은 사실 시기와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선의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6 선의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수호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지만 17 이기적인 동기에서 전하는 자들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를 괴롭힐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가식으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니 나에게는 기쁜 일입니다또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내가 지금은 갇혀 있지만 그것이 마침내는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에게 구원을 가져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필리피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감옥에서 필리피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가 그 감옥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고 있습니다어떻게 그 사도바오로가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필리피서 1장 18절을 보면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한글성경에는 그렇게 뭉뚱그려서 표현을 해 놓았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첫 번째 기뻐하다와 두 번째 기뻐하다는 각기 다른 절에 걸리는 단어입니다.

 첫 번째 기뻐하다는 그 앞에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걸리는 것이고 두 번째 기뻐하다는 19절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상황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더 편만 하게 전파되는 것을 기뻐함과 동시에 그 상황이 자신의 구원의 완성에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사도 바오로가 이 구절을 어디에서 인용 해다가 썼는지를 알게 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욥기13:15-16) 15 어차피 그의 손에 죽을 몸아무 바랄 것도 없지만 나의 걸어 온 발자취를 그의 앞에 낱낱이 밝히리라. 16 이렇게 그의 앞에 나설 수 있음이 곧 나의 구원일는지도 모르는 일위선자는 감히 그의 앞에 설 수도 없다네.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서 1장 19절을 여기에서 인용 해다가 쓴 것입니다이 구절은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네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어서 그런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지탄을 했을 때 욥이 친구들의 지탄에 자신의 상황을 친구들에게 변명하는 구절입니다

한글성경에는 15절이 조금 아쉽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욥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죽이실 것이라는 절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 구절은 원어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해 보면 하느님께서 나를 죽이신다고 하여도 나는 잃을 것이 없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까 주신 분도 하느님이시오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자기는 잃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욥은 그러한 자신의 상황이 자신의 불경건함과 때를 제거하고 자신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거기에 덧붙입니다.

16절의 위선자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하네프는 불경건한때 묻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욥은 그러한 자신의 상황은하느님께서 자신의 불경건함과 때를 제거하시고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서에서 바로 욥의 그 고백을 인용 해다가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기뻐하며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하느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사도 바오로나 욥은 그들의 인생에 일어나는 고난을 하느님께서 자신들 속에 남아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구원의 과정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필리피서 1장 20절로 가보면 더 확실해 집니다.

 

(필리1:20)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실컷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대와 소망에 의하면 자신은 지금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이 구절도 구약의 시편34편에서 인용 해다가 쓴 구절입니다.

 

(시편34: 3-5) 3 나와 함께 '야훼높으시도다노래 부르자모두 소리 맞춰 그 이름을 기리자. 4 야훼 찾아 호소할 때 들어 주시고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5 그를 쳐다보는 자그 얼굴 빛나고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오로가 지금 이 시편 34편의 구절들을 인용해서 자신이 왜 감옥 속에서도 기쁠 수밖에 없는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34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으로 도망갔다가 미친 척해서 겨우 살아난 뒤 쓴 시입니다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그런데 다윗은 난 부끄럽지 않다고 시를 쓰고 있습니다.

사무엘서로 가서 그 상황을 한번 보지요그 상황이 얼마나 부끄러운 상황인지.

 

(1사무21:11-15) 11 사울을 피하여 도망치던 다윗은 그 날로 갓 나라 왕 아기스를 찾아 갔다. 12 아기스의 신하들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 나라의 왕 다윗임에 틀림없습니다사람들이 춤추며,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하며 찬양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13 이 말에 다윗은 가슴이 뜨끔했다그는 갓 나라 왕 아기스가 몹시 두려워 14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미친 시늉을 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서는 발작을 일으키고 성문짝에 글자를 되는 대로 써갈기기도 하며 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하였다. 15 이것을 보고 아기스가 신하들을 꾸짖었다. '미친 놈이 아니냐어쩌자고 이런 자를 나에게 끌어 왔느냐?

 

잘 보세요다윗이 지금 누구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까갓 왕 아기스 앞에서 두려워 미친 척하고 있습니다다윗이 때려죽인 골리앗이 어디 사람입니까바로 갓 사람입니다다윗은 자신이 때려죽인 골리앗의 나라 갓에 가서 그 수모를 겪는 것입니다왜 하느님께서 다윗을 갓까지 보내셔서 그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아세요?

하느님은 다윗에게 그가 골리앗을 때려죽인 일은 그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 것이라는 걸 다윗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다윗을 다시 갓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네가 조롱하는 만군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으로 가노라라고 외쳤던 맹장으로서가 아니라 미친척해서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는 겁쟁이의 모습으로 다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다윗이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을 발휘해서 하느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와 통치 속에서 그 분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살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미친척 하면서 위기를 모면한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상황들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느님의 세밀한 손길임을 깨닫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다윗이 그 일을 어떻게 결론을 맺고 있는지 보세요.

 

(시편34:19-22) 19 올바른 사람에게 불행이 겹쳐도 야훼께서는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해 주시고 20 뼈 한 마디도 부러지지 않도록 고이고이 지켜 주신다. 21 악인들은 그 행실로써 죽음을 부르고 의인을 미워하는 자 멸망하리라. 22 야훼께서 당신 종의 목숨을 구하시니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죽지 않으리라.

 

다윗은 그의 부끄러움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완성시키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그래서 다윗은 그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난 부끄럽지 않다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렇게 하느님을 찬송하는 찬송 시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과 연결시켜 보세요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신 분누구입니까예수 그리스도지요우리는 고난과 수난을 통과하시고 죽으셨지만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윗을 통해서 본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또 배울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필리피서에서 바로 그 다윗의 삶을 인용해서 자신의 처지를 필리피 교인들에게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필리피가 어떤 곳입니까바오로가 갇혀 있던 감옥문이 열리고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던 그런 곳입니다. 

그런데 그 필리피교회에게 사도바오로가 로마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우리의 생각대로 하자면 바오로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그 편지를 받아보는 필립보 사람들이 아니 여기서는 그렇게 감옥문도 척척 열고 나가더니 왜 거기서는 여전히 갇혀 있나?’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필리피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그가 가장 자신 있었던 바로 그 것을 하느님은 부수시는 것입니다그게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니 교만하지 마라’ 

바오로는 그 하느님의 심중을 알았습니다그래서 바오로가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다윗이 그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내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이 모든 상황은 나의 구원에 유익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상황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오로의 凡事가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감옥에 갇혀서 부끄러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상황도 이렇게 기쁜데 다른 무엇이 그의 기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이렇게 우리의 목표 지점이 정확히 설정이 되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아니 그 상황 속에서도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가 가장 자신 있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까지 쳐내십니다그래서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 말씀대로 잘 살아내고 계십니까잘 안 되지요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을 하느님은 계속 쳐내십니다그게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그렇게 실패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불의와 죄와 악의 잔재를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우리 모두는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더러운 옛 사람의 잔재를 모두 다 가지고 있습니다막 구원받은 사람들은 오물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까지도 더러운 똥 걸레 ‘filthy rag’라고 하십니다그러니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더러운 오물들이 잔재해 있겠습니까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심판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에게 던져지는 심판은 죄인들에게 쏟아지는 심판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심판은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기 위한 거룩한 심판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고난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삶에 만사형통일사천리의 복만 쏟아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의 거룩을 완성시켜 가야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도바오로와 다윗의 고백처럼 부끄러워 하셔서는 안 됩니다오히려 그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었던 천상의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흠 없는 하늘나라 백성으로의 완성이지 이 땅에서의 소원 성취문제 해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오히려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도 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하느님의 손길을 읽어 내며 기쁨의 찬송을 부르실 수 있는 참 성도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의 찬송처럼 그분은 우리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 이시기 때문입니다전능하신 하느님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그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면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최상의 상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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